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연평해전은 우리의 해군장병들이 북한으로부터 NLL의 평화를 지키고 서해바다를 수호하기 위해 북한과 벌였던 전투입니다.


1,2차 연평해전과 대청해전이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장병들도 있는데 참 고맙고 미안합니다 ㅠ.ㅠ


그렇다면 이 세차례의 연평해전은 어떤 전개 과정을 갖고 있을까요? 


이점이 궁금했던 저는 자료를 참하여 나름 전개과정과 원인, 결과에 대한 분석글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설명하는 부분은 반말로함을 양해부탁드립니당 ㅠㅠ..


그리고 이걸 쓰기위해 참고한 자료들은 맨 밑에 적어둘테니 연평해전과 관련해서 궁금하신분이나 글을 쓰는 분들이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NLL

 

1)NLL이란

 

북방한계선 NLL1953년 정전협정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설정된 이후, 남북한 간에 지난 50여년 간 지켜 져온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이다 동해의 NLL은 지상의 군사분계선의 연장선을 기준으로 설정하였고, 서해의 NLL은 서해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의 중간선을 기준으로 한강하구로부터 서북쪽으로 12개 좌표를 연결하여 설정하였다.

 

2) NLL 설정과 배경

 

1951710일 이후 2년여 간 이어진 정전협상 과정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연해수역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인하여 지상에서의 군사분계선과 같이 쌍방 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해상경계선에 대한 합의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1953830일 유엔사령관은 한반도 해역에서 남북 간 우발적 무력 충돌 발생가능성을 줄이고 예방 한다는 목적으로 동해 및 서해에 해군 및 공군의 초계활동을 한정하기 위하여 북방한계선을 설정한 것이었다.

 

NLL 설정 이후 북한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197310월부터 11월까지 43회에 걸쳐 서해 NLL을 의도적으로 침범하는 이른바 서해사태를 유발시켰다.


이 사태에 개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197312월에 개최된 제346차 및 347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은 처음으로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이북 수역은 자기들의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서해 5개 도서에 출입하는 선박에 대한 사전허가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유엔사는 정전협정 문구와 정신을 위반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궤변이라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1992년에 체결된 남북기본 합의서 및 불가침부속합의서를 통하여 쌍방의 관할구역을 합의, 체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본 합의서 제 11조에서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7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 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명시 하였고. 불가침 부속합의서 제 10조에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한 구역으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2.연평해전

 

1)사건의 배경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이후로 다시 북한은 NLL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왔다, 한국 국방부는 NLL 남쪽해상을 우리의 배타적 주권이 미치는 사실상 영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였고, 북한은 유엔군의 NLL 설정에 합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해리 영해에 따라 NLL남쪽까지 주권이 미친다고 주장하여 이 해역이 영해시비에 휘말려 있었다. 


이 해역은 특히 꽃게잡이의 황금어장이어서 이 어장을 노린 북한의 어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북한 경비정이 매년 2~30차례씩 NLL을 침범했으며, 1997년에는 남북 함정 간에 함포를 발사하는 포격전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199967일 북한경비정과 어선들이 서해상의 한국 영해를 침범하여 북방한계선 (NLL)을 넘나들면서 우리 해군과 대치하였다.



(픽사베이에 올라와있는 멋진 소래포구의 풍경사진, 이런 아름다운 서해는 우리가 지켜야할 우리의 바다입니당!)

 

2)사건의 전개

 

199967, 북한의 어선 8척이 옹진군 연평도 서방 10km지점의 북방한계선 아래 1.5km까지 넘어왔다. 이에 북한 경비정 수척이 북한 어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계선을 넘어 영해를 침범했으며


북한 경비정은 한계선 남쪽 10km 지점의 완충구역에서 밤샘 경계활동을 펴다가 북상해 해상질주를 하며 퇴각을 종용하는 해군고속정과 신경전을 펼치다 북쪽으로 퇴각했으며, 어선도 북쪽으로 물러가는 행동을 계속했다.

 

한국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고속정 10여척을 경비정에 근접 배치한데 이어 돌발 상황 발생시 화력지원을 위해 한계선이남 40km해역에 제2함대사령부 소속 초계함, 호위함을 주둔시키고 4천톤급 구조함을 추가로 파견하는 등 서해상의 긴장상태가 9일간 계속되었다.

 

615, 오전 845분경 북한경비정 4척이 해군 고속정 4척을 향해 돌진, 충돌공격을 시도했으며 오전 94분 북한 어뢰정 3척이 합류한 가운데 밀고 밀리는 혼전양상을 벌였다


925분경 해군 고속정과 초계함이 영해에 들어온 북한 경비정 2척에 밀어내기 충돌 공격을 하자 오전 928155톤급 북한경비정 1척에서 25mm 기관포로 선제사격을 감행했다. 이에 한국 해군 고속정이 곧바로 40mm 기관포로 응사한데 이어 초계함이 2분 뒤인 93076mm 기관포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이때부터 942분까지 14분간 교전이 벌어졌다. 한국 해군 초계함과 고속정에서 발사된 포탄이 북한 어뢰정 1척과 중형 경비정 2척에 명중, 북한 어뢰정은 선체에 화재가 발생, 침몰했고 나머지 어뢰정 2척과 경비정 3척이 도주했다. 침몰상태인 경비정은 다른 경비정이 북쪽으로 끌고 갔다.

 

한국 함정 2척이 북측의 포탄을 맞아 기관실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이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대파된 북한 경비정들이 퇴각하자 오전 948분께 해군함정들이 한계선 남쪽 완충구역으로 빠지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3)사건의 결과


교전 과정에서 선제공격을 했던 북측에서는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중형 경비정 1척이 반 침몰했으며, 그밖에 소형 및 중형경비정 3-4척이 파손된 채 도주하였다


북한 측의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CNN방송이 615일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 서해상에서 발생한 남북한의 교전으로 북한군은 적어도 30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측은 고속정과 초계함 2척이 일부 파손됐으며, 고속정 정장과 대원 7명이 부상을 입었다.


4) 남한정부의 입장과 대응

 

한국 국방부는 북한의 북방한계선 침범에 대해 남북 기본합의서와 불가침 부속합의서를 위반한 명백한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침범을 즉각 중단하지 않을 경우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99년 당시 조성태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아무리 북방한계선의 무 실화를 기대해도 북방한계선은 휴전 이래 우리 측이 실효적으로 지배해온 결코 유린될 수 없는 해상군사분계선으로써 확실히 지켜질 것이다.” 라고 밝혔다.


교전 직후 한국군은 인근 해군과 해병에 데프콘3에 준하는 전투준비 태세를 내렸고, 한미연합사는 오전 11시 대북 경보 감시태세를 심각한 위협이 존재할 때 발동하는 워치콘2로 격상했다


주한 미군은 한미연합 방위력 강화에 필요한 미군 전력을 신속하게 지원키로 했다. 남북한 해군이 교전국면으로 돌입하자 한구고가 미국군 당국은 한미군사위원회를 열고 양국이 긴밀한 군사적 공조체제를 펼치기로 했다. 미군은 한미 간의 전력증강 배치 합의에 따라 하와이 등 태평양 일대에 배치된 미 해, 공군 전력을 한반도로 증강 배치하였다.

 

5)북한의 입장과 대응


북한은 북한 경비정의 서해상 침범에 따른 한반도 긴장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사-북한국간 장성급 회담을 개최하자는 유엔사측 제의를 수락하였다. 유엔사와 북한군간 제 9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북방한계선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기준점이 포함된 새로운 해상경계선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유엔사는 NLL을 준수해야 하며, 새로운 해상불가침 경계선 문제는 남북군사공동위에서 협의할 사항이라고 대응하고 북측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에 북한은 그해 92일에 조선 서해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하고 북방한계선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해상 군사경계수역의 범위를 제시하는 한편, 동 수역에 대한 자위권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서해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는 해상경계선 설정이 시급히 요구되고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과 국제법의 초보적인 요구마저 무시하고 유엔군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설정된 비법적인 선이므로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3.2차 연평해전

 

1)1차 연평해전 이후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

 

19996월 서해상에서 연평해전을 일으킨 북한은, 동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유엔사와 북한군간 제 9차 판문점 장성급 회담에서 북방한계선은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기준점이 포함된 새로운 해상경계선을 제시하였다.

 

또한 해상경계선 문제를 장성급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해상 경계선 문제를 토의할 전문가 및 군사관계자를 포함한 북··남 실무회담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유엔사는 NLL을 준수해야 하며, 새로운 해상불가침 경계선 문제는 남북군사공동위에서 협의할 사항이라고 대응하고 북측 제의를 거부하였다.

 

2)북한의 준비


기존의 남한해군의 5단계 (경고 방송-시위 기동-차단 기동-경고 사격- 격파 사격) 교전수칙은 애초에 사소한 충돌로 인하여 서해상의 무력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김영삼 정권때부터 이미 수립되어 이어져 오던 교전수칙이다 


북한은 1차 연평해전에서 북한해군은 장비에서 훨씬 압도적인 남한해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였는데 이와 같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바로 시위기동에서 차단기동(이른바 소위 밀어내기)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기습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3년간 철저히 준비하였다. 1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날짜와 2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날짜가 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보복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3)사건의 전개

 

2002629일 오전 1025분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남한해군은 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에게 즉각 기수를 돌릴 것을 권고하는 경고방송을 했고 그래도 북측 경비정이 이에 응하지 않자 시위기동에 들어갔는데 시위기동에서 차단기동의 넘어가는 단계의 시점에 북한해군의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의 85mm 고사포의 선제공격이 발생했다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받는 치열한 격전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대위(당시 중위)가 정장 대리임무를 수행했는데 이희완 대위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 공으로 이희완 대위는 해군에 현역으로 남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84월에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20076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 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62일 실전 배치되었다.


 2009923STX 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 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 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

 

전사자의 명단

 

윤 영 하 소령(정장, 당시 대위, 충무무공훈장 추서)

한 상 국 중사(조타장, 화랑무공훈장 추서)

조 천 형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황 도 현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서 후 원 중사(내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박 동 혁 병장(의무병, 당시 상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4)남한 정부의 대응

 

처음에는 햇볕 정책의 일환으로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여론의 강경대응 요구와 그에 맞물려 벌어진 윤광웅 국방 장관의 NLL은 실질적인 북방한계선이 아니라고 발언까지 겹쳐서 정부와 국방부는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당했다. 그리하여 결국 국방장관은 교체 되었고 교전 수칙이 변경되었다.

 

<교전수칙의 변경>

 

기존의 교전규칙 경고 방송-시위 기동-사단 기동-경고 사격- 격파 사격

 

개전 후 교전 규칙: 시단 기동- 경고 사격- 격파 사격


위처럼 5단계의 교전 수칙이 3단계로 줄어들었다.


(2004년에 한미연합사령부에서의 논의 끝에 최종적으로 개정됨-전시작전권이 없는 한국은 교전수칙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을 개정할 때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통해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개정해야함)


북한에 대해 북한의 사과,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유엔사는 이를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으로 규정하여 항의하고 이를 토의하기 위한 판문점 장성급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20028월 소위백서에서 


첫째 북방한계선은 서해 해상경계선이 아니면, 미국 자신들과 사전합의나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비법적인 선이고 


둘째,“NLL이 장 충돌과 전쟁발발의 화근이라고 하면서, 한국과 미국이 군사적 충돌을 야기 시키기 위해 NLL을 고집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후 20063월과 5월에 개최된 제3,4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북한은 북측과 남측의 군 당국이 주최가 되어, 서해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서해 해상군가분계선확정문제에 대한 협의를 강력히 주장한데 이어 20075월의 제5차 회담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여 제기 하였다.

 

 

5)남북한 장성급 군사회담 (2005.7.21)핫라인의 설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8&oid=044&aid=0000052150

 

2005년 남북한 정부는 장성급회담 및 여타의 접촉을 통해서 핫라인을 만드는 데에 합의하였다. 이는 상호 사전연락과 호출을 통해 우발적인 서해상에서의 충돌과 분쟁을 완화하기 위함이었다.

 

6)200710월의 2차 남북 정상 회담 시 공동어로수역, 평화수역 제안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여 남, 북의 어선들이 수역 내에서 자유롭게 조업하고 평화수역을 지정하여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자는 구상으로서 제2차 남북정상 회담 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북측에 제안하였음


->그러나 후속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합의도출에 실패


->20083월 북한의 “NLL은 유령선발언으로 사실상 백지화

 

4.대청해전

 

사건의 배경

 

이명박 정권은 햇볕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북한에게 끌려 다니지 만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표현하였고 북한에게 남북관계에 있어서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나와 줄 것을 촉구 북한은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 매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2008년부터 2009년 상반기 까지의 남북관계는 전반적으로 매우 불편했음.

 

2008년 이후부터 2009년까지 북한은 남한정부에 연일 강경한 발언과 조치들(12.1 남북육로통행제한조치)을 취하였으며 더불어서 핵실험(2009.5)과 미사일 실험을 하였음


또한 개성공단 근로자 납치자사건 까지 맞물리며 남북관계는 최악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음.

 

->그러나 현정은 회장의 09.8.17의 방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으로 개성공단 근로자의 석방과 개성공단 재가동이 이루어졌으며 금강산 관광의 재개에도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고, 같은 달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는 서울을 방문하였고 


10월의 임진강 참사 사건이 있었으나 북한의 외교관례치고는 굉장히 성의 있는 표현과 태도를 보이기도 했음


 

2)사건의 원인에 대한 여러 의견들

 

-이해에 있던 1118일 오 바 마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미국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최근 합의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남북정상회담의 물밑 접촉과 맞물려있다.

 

<일본 NHK 방송은 지난 12일 한국 정부 관계자 말을 인용,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 부장이 지난 17일과 18일 싱가포르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공식 회동을 했으나 북측은 '남쪽으로 갈 준비가 안됐다'며 장소 이견차로 협상이 결렬됐다고 보도하였다. 아이뉴스 09/11/16 “남북정상회담 장소에 구에 받을 필요 없다기사>


3)사건의 전개

 

->사건 발생 뒤 1116일 국방부의 발표와 세계일보의 1118일 기사를 통해 추가적으로 밝혀진 사실들

 

-85mm->14.5mm

 

-아군 고속정은 5000발 이상 대응사격 (20mm sea-벌컨 탄도 포함)

 

-울산급 호위함 전남호(1800t)와 초계함 순천함(1200t)에서도 76함포 10여발을 발사해 아군 고속정을 지원함

 

5)북한 측의 반응

 

북한 측은 사건 직후 남한해군의 엄중한 도발행위라며 남측에 재발방지촉구와 사죄를 요청했음. 또한 초반에는 보복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후속성명에서 보복조치를 취할 것임을 언급함 


계획된 남측의 도발로 평가함

 


6)남한 측의 대응

 

사건직후 국방부는 합동참모본부 주관으로 긴급회의를 열어 사건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했고, 또한 국방부는 북한 해군의 보복 도발 가능성에 대비하여 감시경계 태세 강화하였다


또한 군은 북한군의 도발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 MDL 일대에서 통신감청 등의 작전을 수행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 김태영 국방장관은 접적지역을 책임지는 여단장과 함대사령관, 비행단장급 이상 지휘관을 책임지역 내에 정 위치토록 하고 우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각 대응태세에 돌입할 수 있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

 

김 장관은 군은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인 NLL을 수호한다는 원칙에 따라 어떤 대응에도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며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하는 한편 접적지역의 감시와 경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군은 서해상에서 우발사태가 발생하면 10분 이내에 출동하기 위해 1개 편대 가 상시 인천 앞바다와 영종도 인근 상공에서 초계활동을 펼쳤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계태세에 만전을 기할 것을 군에 주문했지만 청와대는 1111일 공식적으로 이번사태로 인해 남북관계의 악화를 원치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116일에는 국회 내의 국방의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방부는 이날 오전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북한 군사동향 및 대비태세' 현안보고를 통해 이번 교전을 `대청해전'으로 언급하면서 "북한은 현재 해안포 부대, 해군의 NLL 인근 대비태세, 공군의 황해도 지역 대비태세 등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국방부는 특히 북한의 대남 비방과 관련, "한미 정부보다 군 당국에 한정해 비난하고 있고, 대내체제를 결속하면서 남측에 책임을 전가하고 도발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현 수준의 비난을 지속할 것"이라며 "추후 남북 당국 간 회담 시에 NLL을 쟁점화 하겠다는 의도로 평가 된다"고 분석했다.

 

 

6.참고자료들

 

남북정상회담 합의과정 연구/ 한윤기 서울: 연세대 대학원,


북방한계선(NLL)에 관한 우리의 입장 / 국방부 서울: 국방부, 2007.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해교전과 NLL 서울: MBC프로덕션, 200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7&aid=0000008951 주간동아 1127일의 기사 북경비정 우발적 행동인가 사전에 의도된 도발인가?”2009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11/11/200911110270.asp

해럴드 경제 신문 군 북 보복도발 가능성 경계 만전” 1111일의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8&oid=044&aid=0000052150

코리안 헤럴드 신문 남북한 장성급 회담 재개 논의 2005721일의 기사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12930071

한국경제 신문 “8월 이후 남북 정상회담 위해 여러차례 접촉” 20091129일의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977735


연합뉴스 국방부 북 서해 추가 도발 징후 없어” 20091116일의 기사

http://sisa-issue.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57586&g_menu=050220


아이뉴스 김덕룡 남북정상회담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20091116일의 기사


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816689&cDateYear=2009&cDateMonth=11&cDateDay=11


파이낸셜 뉴스 ,서해교전 과거에도 남도발 억지주장” 20091111일의 기사

-http://news.nate.com/view/20091119n00590?mid=n0204


세계일보 “[단독] 대청해전 때 남 파열탄 사용” 091119일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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