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세계기상기구는 1951년 3월 설립됩니다. 유엔은 이날을 기념하여 3월 23일을 세계 기상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매일 날씨를 확인하시죠? 저도 예보를 보는게 하루의 시작인데요.

 

오늘의 포스팅은 세계기상기구(WMO)를 간단히 소개하고 한국의 일기예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소개해보는 포스팅이에요 :)

 

1.세계 기상기구란?


세계기상기구(WMO)는 국제기상관측을 담당하는 국제기구입니다 모든 유엔 회원국이 가입되어 일기예보 분야에서 협력합니다.

 

WMO의 대표적인 업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구 관측시스템으로 세계적인 일기예보시스템을 주관합니다. 이 시스템은 회원국들의 일기예보위성 정보와 육상 해상의 관측값을 통합하여 정확한 관측을 제공합니다.

 

*WMO는 회원국들에게 기상정보를 제공하고, 각국은 서로 기상자료를 공유합니다.

 

*수출입이 경제의 근본인 한국에게 WMO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자료는 여러나라의 국제 해운, 국제 항공사에도 제공되고

 

운항 지역의 기상정보, 일기예보를 정확히 받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

 

*농업이 주력인 국가들을 위해 특수한 기상정보를 제공합니다. 농업기상학에서는 홍수나 가뭄을 관리하는 노하우도 포함되는데,

 

WMO는 저개발국이나 개도국의 농업기상학을 지원해서 그 나라들이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WMO는 기상관측 외에 대기오염, 오존층 연구,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문제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연구합니다.

 

이렇게 연구된 데이터는 유엔환경기구나, 기후변화대책회의(IPCC)에 제공되고 상호 협동합니다.

 

*WMO에서 큰 지분을 가진 두 나라는 많은 인공위성을 갖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현대적 일기예보 시스템 확립에 기여한 프랑스입니다.

 

 

세계최초의 현대적 일기예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

 

*우리나라 역시 WMO에 가입되어있고 매번 정기적으로 회의에 참석해 기후 대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WMO의 가장 큰 의의는 지구촌이 이 기구를 통해 기상 관측방식을 표준화하고, 적어도 기상, 일기예보 분야에서 만큼은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무역과 교류가 많은 현재 지구의 일기예보 관측과 이 분야에서의 나라를 불문한 협력은 중요하니까요 :)

 

이 기구의 설립 이후 지구촌의 여러나라들은 기상정보를 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WMO는 나라사정이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가난해 자국에 기상청을 만들지 못한 나라의 일기예보 관측시스템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2.한반도 최초의 일기예보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일기예보는 1905 년에 실시됩니다. 조선을 두고 벌어진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일본이 실시했죠.

 

전쟁 중이던 일본은 한반도 일대의 날씨를 파악해야 될 필요를 느꼈고, 부산에 측후소를 설치 한국의 기상을 관측합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좀 분한일이지만 훗날 우리나라가 해방이후 자체적인 일기예보 시스템을 만들어 극복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뿌듯한 일입니다.

 

3.한국 최초의 기상캐스터


한국 기상청 최초의 기상캐스터는 기상청 예보관 출신의 김동완씨 라고합니다

 

지금의 일기예보와 달리 이 때는 예보관이 직접 TV에 나왔습니다

 

초창기 TV 방송엔 현대적인 컴퓨터그래픽이나 CG 효과등이 없었기 때문에

 

기상캐스터가 직접 지도에 나와 일기상태를 그려서 시청자에게 설명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도의 기상지식을 요구했고 그때의 한국에선 예보관들 외엔 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일기 예보 영상입니다.

 

https://youtu.be/2bho5DSemfY

 

최초의 여성 기상캐스터는 이익선씨입니다. 이익선씨는 좋은 인상과 훌륭한 설명으로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샀고

 

그녀의 등장은 훗날 지금처럼 여성 기상캐스터들의 전성시대가 오는 계기가 됩니다.

 

4.한국 일기예보의 아버지 이원철 박사


한국의 제1대 기상청장 이원철 (1896~1963) 박사는 한국 일기예보의 아버지입니다.

 

어린시절 영어 통역관 이었던 형을 둔 박사는 자연스레 영어와 미국문화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학생시절 현재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학업을 이어가던 도중 그의 수학과 과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미국인 교수들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연희전문학교의 미국인 교수들은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는데, 이들은 종종 한국의 독립운동가 들을 후원했고,

 

재능 있는 한국인들을 자꾸 미국에 유학 보냈는데 유학생들이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되거나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다지곤 했습니다. 근데 미국인이라 건드리진 못했다고 합니다.

 

유학 중 한국인 최초로 영어논문을 작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합니다

 

미시간대에서 유학 무려 미국 천문학회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지금도 차별이 없다곤 말 못하지만 동양인은 멸시의 대상이던 그 시절 미국에서 그의 뛰어난 실력은 미국인들을 감탄시켰고

 

미시간대에서 박사까지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어 학업을 성실히 이수 한국인 최초로 천문학 으로 이학분야 박사학위 를 취득한 기록을 갖게 됩니다

 

그밖에도 수학과 물리학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국내에 귀국 약

 

1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의 과학 동호잡지에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기고합니다.

 

“과학분야에서 뒤떨어져 온갖 괴로움을 맛보는 우리는 과학의 중요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문제의 전부가 과학은 아니겠지만 과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시급하며 절실한가를 느끼는

 

우리는 동지가 되어 끝없이 발전되어가는 살아있는 과학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근대화 실패와 식민지배에 대한 비탄이 담긴 멘트였고

 

항상 우리나라의 대학가를 감시하던 일제에게 이는 독립사상을 부추길지 모르는 위험한 글이었습니다.

 

늘 선생을 감시하던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박사를 탄압합니다.

 

이 복잡한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흥업구락부는 기독교계 인물들이 모인 단체였고,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YMCA로 잘 알려진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운영하던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와 자매관계를 맺어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당연히 모임의 목적은 독립운동이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8 년 일제는 흥업구락부에 온갖 거짓증거를 뒤집어씌워 애국지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고,

 

이 피해자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도산 안창호 선생도 있었습니다.

 

일제는 이걸 이용해 눈엣 가시 같았던 연희전문의 교수들을 대거해임하고 박사도 교단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해방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게 되자 선생은 주목받습니다. 천문기상에 전반적 지식을 가진 유일한 한국인 이었기 때문이죠.

 

해방된 우리 대한민국엔 독자적인 일기예보, 기상관측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박사는 기대에 부응하고자 발빠르게 움직여 미군정의 존 하지 사령관을 만나 일제가 남기고간 측후소를 비롯한 기상 시설을 한국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

 

박사를 좋아했던 미국인 교수들도 그를 응원했고 미군은 모든 측후소,일제가 남기고간 장비

자료들을 박사에게 전달합니다.

 

미군정 기상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고 권위도 실어줍니다. 그 결과 정부수립 후 오늘날 기상청의 전신인 국립 중앙관상대가 탄생합니다.

 

조선시대 천문과 기상을 담당하던 관상감에서 따온 이름인데요,

 

이 시기 정부부서들은 조선의 기억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쉽게 부서를 알리려 전통명칭을 활용했습니다.

 

국방부의 최초명칭도 그래서 통위부였죠. 통위부는 대한제국군의 군영중 하나인 통위영에서 따온 것 입니다.

 

관상대장을 맡게 된 선생은 인력부족이 제일 문제라고 판단 열심히 예보관들을 육성했고

 

이것이 한국 기상예보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침마다 기상예보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년의 이원철 박사는 한 공과대학의 설립에 깊게 참여

 

,그 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게 되니 그것이 공대로 유명한 인하대가 되겠습니다.

 

박사는 전후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이공계인력을 육성, 후일을 도모해야 된다고 느껴 의욕적으로 후학을 양성합니다.

 

물욕이 없던 그는 사후 전 재산을 YMCA의 사회봉사에 기증했고,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오늘의 날씨입니다”로 시작하는 일기예보는 냉혹했던 시절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진정한 애국자가 준 선물입니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사가 궁금하신분들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80357

 

박성래 <인물과 과학사> 를 추천합니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을 잘 소개하는 좋은 책입니다. :)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자료참조 1 위키피디아 이원철 박사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B%90%EC%B2%A0_(1896%EB%85%84)

 

자료참조 2 국가기록원 일기예보에 대한 글

https://www.archives.go.kr/archivesdata/upFile/palgan/13571959897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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