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오늘은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는 매년 잊을만하면 한일관계에서 악재가될만큼 두 나라사이에 감정의 골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은 이점에 대해 애국을 한 사람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는 곳이니 별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는 아시아에 큰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의 위패도 같이 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으로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를 달갑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도많고 탈도많은 이 야스쿠니 신사는 어떤기원을 갖고 있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 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야스쿠니 신사의 기원

 

일본의 에도막부가 끝나갈 시점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일명 존왕양이파 인사들은 주로 쵸슈번과 사쓰마번 소속이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의 격동기였고 막부나 기타 정치적 변동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쵸슈번과 사쓰마번 소속의 인사들은 이들의 넋을 달래준다는 의도로


자신이 소속된 번 사람들을 국사순난자(國事殉難者)’로 일컬으며 나름 대접을 후하게 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를 막부말엽 메이지 유신기라고 하여 막말유신기라고 축약해부르는데


이 막말유신기에 이런 배경하에서 이런사람들의 위패를 모시고 받든다며 도쿄에 초혼사를 건립하게 되는데


이 도쿄초혼사가 야스쿠니 신사의 뿌리입니다.

 

2.도쿄 초혼사가 건립되다

 

1869 5월 막부군의 최후의 거점인 하코다테(函館)가 함락됨으로써 보신(戊辰)전쟁은 종결됩니다.


보신 전쟁을 대충 요약하면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존왕양이파에 반대하고 기존에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를 지지했던 세력들이 끝까지 메이지유신의 흐름에 반대해 버티다가, 


결국 서양식 신무기로 무장한 존왕양이파에 의해 제압된 전쟁입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이들을 위령하고자 이전쟁에서 사망한 관군을 제사지내고 위패를 모시려고 도쿄 초혼사를 건립하는데 찬성 그렇게 도쿄 초혼사가 건립 되었습니다



이후에 일본은 징병제나 여러 제도를 통해 과거 막부의 관군 개념이라기 보단 새로운 개념의 일본군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 군의 요청에 따라 도쿄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로 명칭이 바뀌게 됩니다. 


이때 야스쿠니 신사는 특별한 지위를 갖게되는데 그것이 일명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의 지위 입니


별격관폐사란 일본의 전통적인 신앙관념에서 


제신이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천황황족을 제사지내는 신사(관폐사) 다음으로 격이 높은 신사를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도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라는 특별한 지위를 갖게되어 나날이 위세가 높아집니다.



3.그 이후 야스쿠니 신사는 


2차대전에 패전하기 전의 일본은 일반적인 신사들을 국가의 내무성(한국으로 치면 행정자치부 정도겠습니다.)


이 관리했던데에 비해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사망자를 합사한다는 이유로 육해군성이 관할하는 신사로 군사시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등 


여러가지 전쟁을 일본이 할때마다 발생한 사망자들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하게 되면서 야스쿠니신사의 규모와 위세가 크게불어나게 된것입니다.


일본군은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전쟁 희생자를 천황·국가를 위해 죽은 


호국영령으로 부여하고 일종의 죽은 군신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서 프로퍼간다쉽을 전개해 일본의 전쟁이 정당하고 


이런 정당한 전쟁에 참전하는것은 죽어서 호국신이 될수있는 길이라는 


메세지를 담아 일본의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정신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덤으로 이 야스쿠니에는 단지 식민지배시기 뿐만 아니라 강화도사건때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한국의 의병진압에 관련된 일본의 군인들도 합사되어있는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4.그렇다면 왜 문제인가?


태평양전쟁의 장본인인 A급 전범들 즉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침략의 주역 


A급 전범 14명이 함께 합사된것이 가장큰 문제로 꼽힙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합사는 다름아닌 당시의 히로히토도 부정적으로보아서 78년부로 이들이 합사되자


그전까진 야스쿠니신사에가던 히로히토(현재 일왕의 아버지)도 그뒤로는 가서 참배하지 않게됩니다.


말그대로 자신들이 떠받든다는 일명 천황도 가지않는 곳이 된것입니다.


한편 야스쿠니에는 조선인도 2만명이 합사되어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의지건 의지가아니건 일본의 전쟁에 참여하게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경우입니다.


이들의 유족중 적지않은 사람들이 합사를 거부하고 이것을 취소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야스쿠니 신사는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보다못한 2001 6 29일에는 한국인 252(유족 55)들이 


직접 도쿄지방재판소에 야스쿠니신사합사취하소송’ 을 제소했지만 2006 5 25일 기각판결이 내려지고 맙니다.


현재도 이는 논란의 여지가 꽤있는 부분입니다.


한편 유취관이라고 하는 야스쿠니신사의 부속시설에는 


전쟁기념관이란 목적을 빌미로 침략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것들이 마치 자랑하듯 전시되어있는 점이 문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5. 왜 없애지 못하는가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우익세력들의 단순한 정치적인 홍보도구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도 폐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전쟁에 참여했다 전사한 일본인 유족들이 상당히 많이 관련되어있고 


194697일 야스쿠니 신사는 동경 도지사 인증의 단위 종교법인으로 그 지위가 바뀌었지만 그러나 


일본의 전몰자유족회는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표밭이기때문에 


전후의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 


이런상태에서 이곳을 폐쇄했다간 표심이 날아갈걸 우려했던 것입니다.


한편 현재 일본은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하는 측면도 있고 군국주의와 보통국가화에 대한 자국,외국의 우려때문에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이 전사한사람이나 의사자들을 묻어주는 국가차원의 대형 국립추도시설이 없습니다.


사망한 자위대원이나 소방관 경찰등이 묻힐 현충원적 성격의 장소가 


없다보니 결국 신사에 모신경우도 있고,


(현재는 논란이 계속되자 야스쿠니가 아닌 다른신사에 한다고합니다.)


이 경우는 유족들 입장에서도 억울할만 하기에 더더욱 문제가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에대한 대안으로 일본의 온건정치인들은 A급전범들을 야스쿠니에서 분사, 즉 분리해서 다른데빼자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아 쉽지않아보입니다.


최근 한일관계가 많이 굳어져있는데,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문제를 


잘해결해서 우리나라와 갈등의 여지를 줄이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반응형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