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나는 히로시마 원폭피해라는 사례를 통해 일본의 전쟁피해를 조사해봤다. 일본의 전쟁피해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있다.

 

분명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전범 국가이지만, 일본의 일반 민중들은 몇몇 지도층 인사의 잘못된 판단과 전쟁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감수해야했고, 민중들은 막심한 전쟁피해를 감수하면서 전쟁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민중들의 전쟁에 관한 아픈 기억과 피해에 대한 두려움은 훗날 일본의 평화헌법탄생시의 지지와, 50년대 재군비, 개헌론을 주장한 자민당 내 강경우파가 60년대에 들어서 결국 재군비와 개헌론을 포기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가령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수상의 경우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에는 성공하였지만 이후 구체적인 개헌이나 대규모 재군비 등으로의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내가 히로시마 원폭피해 글을써보기로 한 것은 이유가 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실로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또한 그 현장에 있던 조선인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의 경우 세계역사상 유일한 원자폭탄 투하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으며 과연 이러한 원자폭탄의 투하가 적절한 정책 결정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히로시마의 원폭투하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적 평가는 이것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지만, 전쟁 종결에의 유효성 문제를 떠나서 과연 이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1.원자 폭탄 투하의 배경

 

1)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완료

 

미국은 나치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원자폭탄 개발을 결심하게 되었다. 194112월 미국 과학 연구 개발청 장관 바네바 부시가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최종승인을 얻어냈고 실험실과 제조시설을 비밀리에 미군이 건설하였다.

 

그리고 19426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공병대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가속화하였다. 초기연구를 주로 맡았던 컬럼비아 대학이 위치했던 맨해튼을 암호명으로 사용하여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맨해튼 계획이라 명명하였다.

 

찰스 오펜하이머, 엔리코 페르미, 알버트 아인슈타인, 폰 노이먼 등 당시 미국 내에 있던 물리학, 핵물리학, 수학 등 각 과학 분야 최고의 인재들을 포섭하여 수년간 원자폭탄 개발을 진행했던 미국은 1945716일 뉴멕시코주 사막에서의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서 원자폭탄 개발을 완료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은 TNT 15000톤급의 위력을 가진 리틀 보이와 팻맨이라 명명된 원폭 2기를 만들어냈다.

 

2)트루먼의 판단

 

전술하였듯이 오키나와 전투의 피해는 연합군 수뇌부에게 큰 고민을 가져다 주었다. 트루먼 또한 이를 크게 고민하였으며 일본 본토 상륙 시 미군의 극심한 피해를 우려하였다.

 

또한 이미 19455월 독일의 항복이후 유럽에서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던 소련과의 의견대립 그리고 폴란드 처리를 둘러싼 의견의 대립 등은 트루먼으로 하여금 소련에 대한 불신감을 키운 상태였다.

 

트루먼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빨리 종결 짓지 못할 경우 얄타 비밀협정에 의해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한 소련군이 참전하게 되어 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향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제한하게 될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또한 이미 45년도 초부터 과학자,군인 등으로 구성된 임시위원회를 발족하여 만일 원자폭탄이 완성될 경우 완성된 원자폭탄을 일본의 어떠한 지역에 투하하는것이 좋을지를 구상하게 지시를 내린 상태이기도 하였다.


3)일본의 무조건 항복 거부

 

원자폭탄의 개발은 완료되어 있었고 전술하였듯이 트루먼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의 스즈키 칸타로(鈴木 貫太郎) 수상은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1945726일 연합국이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선언)을 거절하였다.

 

이로서 트루먼은 자신의 원폭투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을 거절하기 전인 724일 트루먼이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하였다는 것이 훗날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적 논란이 뒤따르고 있다.

4)원폭투하의 결정-왜 히로시마(廣島)였는가?

 

임시위원회는 다음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후보지를 선택할 것을 명령받았다.

 

첫째 아직 미 공군의 폭격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도시일 것, 둘째 원폭이 폭발한 후 원 5km이 지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한 규모의 도시일 것, 셋째 원폭의 효과가 완벽히 발휘될 수 있는 지형일 것, 넷째 전략적 시설물이 위치한 곳일 것 등이었는데 히로시마는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였다.

 

우선 히로시마는 당시 어느 정도 미 공군의 폭격을 받긴 했지만 다른 주요도시처럼 대규모 공습을 당한 곳은 아니었고,5km의 지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한 규모의 도시였고, 지형상 원폭이 폭발했을 시 후폭풍의 효과를 노리기에 적합했으며 마지막으로 혼슈(本州)내의 일본 호송선의 집결지 역할을 하였고 해군시설을 갖고 있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보아도 우리는 당시 미국이 단지 전쟁을 빨리 종결짓기만을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길이의 지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해야하고 원폭의 효과가 완벽히 발휘 될 수 있는 지형 이어야 할 것들의 조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미국은 처음 사용하는 원자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시험해보고 관찰해보고 싶은 목적도 다분히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임시위원회의 검토와 후보지 결정을 통해 히로시마는 원폭투하지로 선정되었고 1945724일 트루먼은 원폭투하승인 명령서에 사인함으로서 히로시마에의 원자폭탄 투하는 피할 수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원자폭탄의 투하

 

194586일 새벽 145분경 태평양상에 있던 미국의 테니만 기지에서 이륙한 B-29폭격기(에놀라 게이라고 명명된)가 약 7시간 후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하였다.

 

현지 시간으로 오전 815분 경 이었으며 고도 600미터 지점에서 원자폭탄은 폭발하였다.

 

원폭의 투하는 순식간에 엄청난 결과를 야기하였다. 최초 폭발 지점의 온도는 섭씨 6000만도로 올라갔으며 순식간에 폭심지의 모든 건물과 생명체들을 증발시켰다. 반지름 1키로 미터 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태웠고 수많은 건물들과 철골구조물 들을 녹아내리게 하였다.

 

한편 수백 톤의 위력을 가진 강력한 후폭풍이 지름 6km 지점들까지 모조리 강타하였다. 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당일 하루에만 8만 명이 사망하였다.

 

3.결과와 영향

 

1)일본 측에 미친 영향

 

일본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8 만여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이것은 당시 본토결전을 부르짖던 대본영을 크게 당황하게 만든다.(방사능 피폭후유증, 기타 부작용과 부상 등으로 인해 훗날 누적사망자는 20만 명을 상회하게 된다.)

 

한편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다음날인 87일 히로히토 천황을 만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할 것을 종용한다. 또한 뒤이어진 소련의 참전과 나가사키(長岐)에의 원폭투하는 일본으로 하여금 항복을 결정하게 한다.

 

2)미국 측에 미친 영향

 

트루먼은 원폭투하 성공소식을 듣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위대한(great) 행위였다며 극찬하고, 일본 측을 향해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폭탄들을 지속적으로 투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투하의 성공을 계기로 미국은 훗날 원자폭탄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1949년엔 이미 100기 이상의 원자폭탄을 가지게 된다.

 

또한 당시에 미군 측의 인명피해도 있었는데 소수의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미군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억류되어있었다는 것이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고, 투하 후 그들이 결국 실종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원폭투하 때 모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미국 측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조선인 피해 문제

 

히로시마에는 당시에 5만 여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중 적어도 약 1-2만 명의 조선인이 피폭 당했다고 추측된다.(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4.생존자의 증언

 

1)히다 순타로(比田俊太郞) 씨의 경험

 

그는 의사였고 폭심지에서 6km의 병원에서 진찰 중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후폭풍이 건물을 강타한 후 몇 미터 정도 몸이 떠올랐으며 정신을 차린 후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린 후에 제가 진찰 중 이던 소녀가 무너진 건물의 흙더미 속에 갇힌 것을 보고 바로 꺼냈죠. 아이는 살아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였습니다.”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물체가.. 팔이며 머리 다리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얼굴... 도무지 저것이 괴물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저에게 걸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그러한 것들이 저에게 왔고 저는 그것이 그래도 사람인 것을 알고 좌절했지요.”

 

비슷한 형체를 가진 사람 수 백 명이 누구는 엉금엉금 기어오고, 누구는 걸어오고 있었어요. 모두 검은머리에 부풀어 오른 살 갖에 쩍 벌린 입에 녹아버린 피부를 갖고 있었고 더러 말이 가능한 사람들이 저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어요. 전 의사로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을 보고 좌절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슬픈 기억으로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2)익명을 요구한 재일 조선인의 경험담-1995년 아사히 신문 과의 인터뷰 기록 당시 77

 

어린 시절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족단위로 히로시마에 이주해 왔고, 나는 당시 히로시마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여럿 목격하였다. 폭탄이 떨어진 그날 나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변해버린 피부는 수 십년 이 지난 지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다행인 것은 살았기 때문이다. 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타 죽어가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던 조선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5.원폭 피해자들의 치료와 배상문제

 

1)일본인 원폭 피해자의 치료와 배상 문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사능 피폭후유증, 피폭당시의 각종 질환과 부상 등을 겪게 하여 수많은 후유증 환자를 남겼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렇다 할 의료적 지원이나 생계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1954년 미국의 비키니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해 일본의 어부들이 방사능 낙진의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법정에서 배상판결을 받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한편, 원폭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하여 일명 원호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속적인 운동의 결과로 일본 국내에서는 1957년에 '원자 폭탄 피폭자의 의료에 관한 법률1968년에 '원자폭탄 피해자에 대한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일명 피폭자 원호법)이 제정되고 일본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생활 보호·의료 혜택이 제도화되었다.

 

2)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의 치료와 배상문제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인 역시 수 만 명이 피해를 입었으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피폭당시에도 현지 일본인 군인이나 경찰들에 의해 차별당하거나 병원에서도 일본인 위주의 구호가 이루어져 최소한의 응급조치 조차 받지 못한 조선인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경우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으나, 조약과 협정 문서 어느 부분에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 내용은 명시되지 않았으며, 대일보상청구권은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경제협력기금을 통해 일괄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1966년에 사단법인 한국 원폭피해자 원호 협회(후에 원호 삭제하여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 이하 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 있었던 손 진 두 재판은 한국인들도 피폭자 수첩을 받을 수 있게 한 판례를 남긴 기록적인 승리였다. 7년에 거친 재판을 통해 결국 손 진 두는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 받음과 동시에 원폭후유증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적인 승리도 곧 이어진 조치에 의해 의미가 퇴색되었다. 일본 후생성이 통달 402호를 내려서 피폭자 수첩 소지인이 일본 영토를 벗어나게 되면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피해자들의 보상요구운동으로 인해 일본정부는 마지못해 1980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지만, 그들에게 일본으로 가는 여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최소 1만 명에서 2만 명 정도의 피폭 후유증을 겪은 자들이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통해 치료를 받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단 351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것 조차도 1986년을 끝으로 종료되어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일본정부로부터의 아무런 원호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부터 미약하게나마 한국 내에서의 원폭피해자 치료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협회는 일본인 피해자들이 1987년까지 받은 보상금을 기준으로 책정한 23억 달러를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즈음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당시 일본은 40억 엔의 인도적 지원금을 제공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후 곽귀훈이 오사카와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 재외피폭자원호법 적용을 위한 재판에서 승소함으로써 20033월부터는 한국인에게도 원호법 적용 수당과 의료지원이 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규모와 상태는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며, 한국원폭피해자 협회에 등록된 회원 2300명 중 800여명은 아직도 원호법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800명이 원호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이다. 건강수첩이 있으면 일본 정부가 지급하는 월 32900(30여만 원)의 원호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건강수첩을 받으려면 피폭지역 거주 사실이 기록된 호적등본과 증인 2명의 진술서 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일본에 직접 가서 면접을 해야 한다.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도 국내에서 일본 면접관과 국제전화로 질의응답을 받아야 한다.

 

고령에다 거동이 불편한 대부분 피해자는 일본으로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증인 요건도 피폭 당시 15(75) 이상으로 돼 있어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답변이 조금이라도 시원치 않으면 탈락시킨다.

 

협회의 추정에 의하면, 피폭되고서도 살아남은 조선인 3만 명 중 약 23천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004년에 이루어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원폭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12,300, 27,500명으로 약 1만 명에 이르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일반 한국인들에 비해 건강상태가 열악하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재 피폭자들을 지원하는 시설은 합천의 원폭피해자 복지회관 한 곳 뿐이다. 게다가 1990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부가 제공한 40억 엔으로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원폭피해자 복지기금 역시 조만간 고갈될 예정이어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한편 북한에는 현재 약 2000여명의 원폭 피해자들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2005년 기준, 평화네트워크), 보다 자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에 있는 원폭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북-일간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상금의 지급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북한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북한의 상황에서 재북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보여 진다.

 

6.아픔의 추도와 기념

 

히로시마는 점령통치가 종결되는 (1952)시점을 전후하여 평화도시법에 따른 국가의 지원과 한국전쟁의 특수에 힘입어 히로시마 부흥 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부흥사업의 핵심 중 하나는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만드는 작업이었으며, 그 일환으로 평화기념 공원을 조성했다.

 

히로시마 시내에 평화기념 공원을 만들기 위해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쳤다. 공원계획의 결정용지확보공간구성의 결정건물의 정비건물 정비 이후의 부분적인 변경개축이라는 단계를 거쳐 평화공원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초의 부흥도시 계획의 일부인 평화공원은 中島(나까지마)公園이라고 불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보통의 공원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미국의 공원계획가(히로시마에 진주한)연방군이 파견한 부흥고문 등이 평화기념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어 1949년에 공원설계 작품을 경쟁 모집할 때, 평화 기념의 개념을 살린 평화기념 공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2년의 도시계획 속에 평화기념 공원이라고 위치 지워짐으로써, 보통의 공원이 아닌 기념시설이 되었다.

 

예전의 번화가인 나까지마(中島) 지구의 경우 피폭 후에 재건된 민가를 이전시키는 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나까지마 지구에 평화기념 공원을 세우고 그 공원 안에 평화 기념관자료관을 건설하는 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성된 평화 기념공원은 예상을 뛰어넘는 역할을 하면서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빛냈다. 냉전시대에 핵무기의 공포가 증대되면서, 히로시마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가치를 전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도시로 정착했다.

 

이렇게 반핵평화의 메카가 된 히로시마에서는 연중무휴로 평화 관련 행사토론회가 열리고 있으며, 피폭일인 86일 전후로 반핵평화 세계대회평화의 식전(式典)5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세운 각종 평화기관(히로시마 평화문화 센터 등), 평화교육 기관(히로시마 대학, 히로시마 평화교육 연구소 등), 평화연구 기관(히로시마 시립대학 부설 평화연구소 등), 피폭 관련 시설단체(히로시마 적십자 원폭병원,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협의회 등), 평화운동 단체<原水協, 原水禁, 세계평화 연대 도시 시장회의(Mayors for Peace) >가 평화도시 히로시마의 빛을 더욱 강하게 발산하고 있다.

 

 

8.역사적 평가-원자폭탄 투하는 적절한 결정이었는가?

 

원자폭탄의 투하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많은 피해를 유발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역시 원폭투하 이후에 밝힌 자신들의 견해에서 본토상륙전의 전개 시 감안해야할 연합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투하의 결정에 대하여 정말로 이러한 시각만 존재하고 있었을까? 당시 원자폭탄 투하를 적절하지 못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하는 견해들을 이 부분 서술함으로서 원폭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보고자 한다.

 

1)당시를 경험한 미군 고위 장성들의 회고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의 원수이자, 미 공군의 현대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헨리 아놀드 (Henry H. Arnold) 공군 원수는 자신의 1949년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원자폭탄이 있건, 없건 간에 일본은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 및 트루먼 대통령 비서실장 리히 제독 (Leahy)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을 사용한 것이 우리의 대일전쟁에서 구체적인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효과적인 해상 봉쇄와 전통적인 무기들을 통한 성공적인 폭격으로 일본은 이미 패배되었으며,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생각은 우리가 그것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암흑시대의 야만인들에게 해당되는 도덕 기준을 적용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전쟁을 하라고 배우지는 않았다. 부녀자와 아이들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할 수 없다

 

-당시 미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어네스트 킹 제독 (Ernest king)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만일 미국이 더 기다릴 인내가 있었다면 효과적인 해상 봉쇄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름, , 약품 및 다른 긴요한 물자들의 결핍을 통해 일본을 굶주리게 하여, 항복시켰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역시 자신의 1963년 회고록, '백악관 시절 : 변화를 위한 명령(The White House Years : Mandate for Change), 1953-1956 (312~31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스팀슨 장관이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크게 우려하는 사항들을 말했다. 첫째, 내가 볼 때, 일본은 이미 붕괴되었으므로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하다. 그리고 둘째,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이상 미국의 생존을 보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 아닌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나라가 세계의 여론을 놀라게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바로 그 순간 '체면'을 최소로 손상시키면서 항복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2)과연 원자 폭탄의 투하가 필요 했는가

 

전술한 당시 미군 고위 장성들의 회고 외에도 고위 정치인이나 군 전략입안자들 사이에서도 저와 비슷한 수많은 회고가 존재한다.

 

원폭투하에 관한 미 고위 장성들의 회고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는 적지 않다. 위에 열거한 장군과 제독들은 당시에 각각 미 육군과 해군, 공군 내에서 최고위급이거나 최고 인사들이었고 아이젠하워는 지금도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당시 원자폭탄의 투하의 적절성(전쟁을 일찍 종결한다는 명분하에)에 관해서 당시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고위급 군인들은 정작 회의적 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회고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연합군의 제해권, 제공권의 장악으로 인해 이미 일본은 완벽한 고립된 상태가 된 상태였다.

 

둘째 일본은 이미 대규모 공중폭격을 대규모로 당한 상태(ex19453월의 도쿄 대공습, 19456월의 고베 대폭격, 도쿄대공습은 무려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에서 더 이상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대규모 공중폭격을 당한 도시들이 도쿄(東京) 고베(神戶), 오사카(大阪)등 일본의 주요도시들이었으므로 피해는 막심 하였다.

 

셋째 따라서 이미 저항능력을 상실한 일본에게 무리하게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보다는 다각적인 압박과 항복의 종용을 통해 항복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넷째 훗날 미군의 전략폭격조사단은 패전이후의 일본을 조사하였고 이 조사의 결과로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이 보고서는 원폭투하 이전의 대규모 공중폭격에 전의를 상실하였던 것이 그들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한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近違文磨) 수상 역시 근본적으로 화해하겠다는 결정을 유발한 것은 B-29 폭격기들에 의한 장기간에 걸친 폭격이었다."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 본토의 상황역시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당시 공장과 작업장에 남아있던 모든 것들을 무기를 적재적시에 만들어 내기위해 필사적으로 동원했고 나머지 물자들은 쓸모가 적은 원자재들이 동원했지만 이마져도 대규모 공중 폭격으로 온전하게 남지 못했으며

 

유류공급은 6월 달 이후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7월부터는 도시기준으로 일본에 있는 전체 가옥의 4분의 1이 파괴되었고 국가 교통체계가 거의 붕괴되었다. 식량이 매우 부족하여 대부분 일본인들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연명했다.

 

즉 당시 트루먼을 비롯한 미 정부 인사들이 주장한 미군의 인명피해를 최소화 하는 전쟁의 종결을 위한 원자폭탄의 투하에는 무언가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미 저항능력을 상실한 일본이 과연 본토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과연 트루먼과 미 정부 인사들의 주장대로 대규모의 인명피해를 입히는 것이 가능 했을 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3)결론

 

미국의 원폭투하 결정은 인명피해의 최소화와 신속한 전쟁종결보다는 다분히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미 미국 내의 수정주의 역사가들도 여러 차례 주장하였지만 본격적인 일본 본토에서의 전투에 앞서서 유럽전선의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소련과의 대립이 시작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소련에게 무언가 미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원자폭탄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실험적 목적 또한 깔려있음을 배제 할 수 없다. 미국은 사막이 아닌 실제 인명이 거주한 곳에서 원자폭탄의 효과를 관찰하고 그 위력을 제대로 파악해보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원자폭탄 투하 지점의 선정과정을 살펴보면 원자폭탄의 효과를 잘 관찰 할 수 있는 지형이라는 조건을 상당히 고려하고 많은 자료 수집을 통해 인구밀집 지대를 파악한 흔적이 보인다.)

 

현재 지구상에는 수만 기의 핵탄두가 존재하고 있다. 핵은 핵 억지력을 가지고 있고 먼저 핵을 사용하면 공멸한다는 의식 때문에 전쟁을 막고 핵사용을 막는다고 말하는 견해도 있지만 만일 이러한 핵이 혹시라도 잘못 사용된다면 제2의 히로시마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동북아시아는 실제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이 자리하고 있고, 북한의 2006년과 2009년의 연이은 핵실험과 핵보유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남한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등 핵문제에 있어 평화롭지 못한 지역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일본역시 상당한 원자력 기술을 갖고 있다.)

 

반성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동북아가 핵위협이 없는 동북아를 만들지 못하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에 동북아에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에게 큰 짐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아래에는 제가 지식이 딸려 참고한 책들입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정 영 신 미야우치 아키오 옮김, 오키나와 현대사,논형 , 2008.

 

스티븐 워커 지음, 권 기 대 옮김 카운트다운 히로시마황금가지, 2005.

 

이 동 훈 지음 전쟁영화로 마스터 하는 2차세계대전,가람기획, 2009.

 

김 영 애 편역일본 언론으로 보는 종전 50,도서출판 장락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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