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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템킨호 수병반란사건은 러시아 역사에 은근히 큰 영향을 미친사건입니다.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1925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 이 연출한 소련의 무성 영화이다. 옛 제정러시아의 수병들의 반란사건인 포템킨 호의 반란에 기본을 두었으며 사회주의 혁명 선전영화로 만들어졌다.

 

몽타주 기법에 기본을 두어서 만든 영화로 영화사적 의의가 크다. 음악은 원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으로 영화 상영 곡에 포함되어 있다. 75분의 무성영화다.

 

본 영화의 감독은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예이젠시테인(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1898 ~1948)은 소련의 영화감독·영화 이론가이다. 건축을 배운 후 적군에 참가, 선전반의 미술관계를 담당했다. 혁명 후는 무대 연출가가 되었다가 1923년 영화 감독이 되고 훗날 전함 포템킨으로 잘 알려졌다.

 

러시아에 최초로 영화가 소개된 계기는 뤼미에르 형제가 니콜라이 2세를 촬영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다. (뤼미에르 형제는 cinematography라는 기계장치로 영화를 상영함으로서 영화사에 최초의 족적을 남긴 인물들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해 18965월 전 러시아 박람회에서 영화에 대해 폭넓게 소개 됨으로서 러시아인들은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 유학했던 러시아인들이 영화와 영화 촬영 및 기법 등에 대해 공부하고 본국인 러시아로 돌아온 이후로 영화와 관련된 제반지식들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흐르던 러시아의 영화사는 러시아 혁명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본 보고서의 다른 부분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영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성립이후 국가가 영화산업을 관리하게 됨으로서 영화계는 주로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원하는 선전이나 홍보, 혁명과 관련된 사실을 부각하는 영화들을 상당수 제작하게 되었는데 전함 포템킨도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전함 포템킨>을 제대로 분석 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시공간과 영화의 시공간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본 수업 <역사 재해석과 영화>의 목적은 단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나오는 역사적 시대를 공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알고 역사영화를 재해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템킨 호 봉기사건이 일어난 시대만을 분석하고 알아보는 것 보다 영화의 시공간즉 영화가 촬영 되었던 시점의 시대에 대해서도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것을 전쟁, 사건, 혁명이라는 3가지의 키워드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았다.

 

포템킨호의 수병봉기 사건이 있던 시기 러시아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구시대적인 농노제와 일부 대지주와 귀족들의 탐욕으로 대다수의 민중은 민생고와 도탄에 빠져있던 상태에서 러일전쟁의 패배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 시키기에 충분했다. 러시아는 1904년부터 1905년 사이 일본과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세력과 패권구축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나(러일전쟁)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결과 일본은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실히 공고히 하고 아시아의 열강이 되었지만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위신이 실추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황제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유럽 방면의 병력을 극동으로 수송하는 것이 곤란해 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1905122일 제정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했다.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가폰(Georgy Gapon)신부의 주동으로 굶주림과 빈곤으로 지치고, 불평등한 사회체제로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이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는데, 이들에 대해 제정 러시아 정부는 유혈진압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훗날 이 역사적 사건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전국에 대규모 시위와 연이은 봉기를 불렀으며 러시아군은 당시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극동으로 병력을 출병할 여유가 없었다.

 

분노한 민중들에게 놀란 니콜라이 2세는 의회개설과 사회개혁, 빈곤문제 해소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러시아인 민중들에게 약속하였지만 이 약속은 대개 지켜지지 못했고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전함 포템킨 호의 수병 봉기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발생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및 러시아 1차 혁명은 러시아 전역에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영화 <전함 포템킨>은 훗날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였던 1920년대에 촬영된 작품이다. 사실 러시아는 이미 낡은 모순들로 인해서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한 상태였다.

 

대게의 유럽국가 들이 폐지한 농노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귀족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통치에 골몰하고 있었다. 또한 빈부격차와 생계문제는 러시아 민중들이 이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이미 이러한 모순들에 대한 저항들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뿌까초프 반란, 데카브리스트의 난, 청년 지식인들의 계몽운동 등이 그렇다.

 

이러한 상황 하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외국유학을 마친 러시아 지식인들에 의한 다양한 사회계몽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 당시에 다양한 사상들도 소개되었는데 사회주의역시 이러한 시기에 유입되었다.

 

1898년 레닌과 플레하노프의 사회 민주 노동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구 체제의 모순들을 지적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훗날 볼셰비키와 맨셰비키로 분열 되는데 혁명의 주도권을 잡고 소비에트 연방 정부를 수립 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볼셰비키 세력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세력과 맨셰비키 세력들은 연합하여 3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당시 러시아 민중들은 러시아의 1차 대전 개입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당시 러시아 측은 참전자만 1천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와 그로인한 국민 생활 결핍으로 인해 러시아 전제정권에 엄청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을 잘 이용한 러시아의 혁명세력들은 민중들을 결집시켜 전쟁중지를 요구하고 식량을 배급할 것과 전제 정치를 타도하고 형식적인 의회가 아닌 민중들을 위한 의회를 조직할 것을 요구하며 혁명의 도화선을 당겼다.

 

마침내 군인들까지 가세하고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러시아 전제정권을 압박하자 제정은 붕괴되고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3월 혁명은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멘셰비키가 주도적으로 3월 혁명에 나섰기 때문인데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에 비해서 사회개혁을 위한 의지와 실행력이 부족하였고 구 지배계급과 결탁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대다수의 러시아 민중이 반대하는 1차 대전 참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서 민심을 잃고 말았다.

 

결국 레닌, 트로츠키의 주도로 11월 혁명이 발발하였으며 임시정부는 전복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앞날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첫째로는 적백내전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혁명이후의 사회개혁(토지분배, 배급제의 시행, 자본가와 지주의 재산몰수 등)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백 내전은 노동자와 농민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 세력이 주축이 된 적군과 11월 혁명으로 인해 권력을 상실한 맨셰비키와 구 황실 귀족 및 구 기득권층이 주축이 된 백군과의 전쟁 이었다. 192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체코 등 14개국이 백군에게 지원을 함으로서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범국민적 인 적군에 대한 지지와 레온트로츠키의 뛰어난 군사적인 지휘 능력이 뒷받침되어 적군이 끝내 승리하게 된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열강들은 국내 복구를 우선시 했던 탓에 백군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할 순 없었다. 적백내전에서 적군은 승리하였지만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고 사회개혁의 속도를 조절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회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것의 급진성에도 원인이 있었다. 급격한 토지 개혁과 식량공출 그리고 시장 질서의 해체는 이러한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혼란과 반발을 초래했다. 따라서 레닌은 NEP(신 경제정책 1921-28년간 수행됨)를 제시하고 사유재산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시장적 질서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레닌이 1924년 사망하고 러시아는 집단지도체제에 돌입한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명언이 말해주듯 얼마가지 못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이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패배한 트로츠키는 망명을 택하고 스탈린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 일국 사회주의론과 영구혁명론)이 크게 달랐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인간관계 또한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둘의 균열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스탈린 집권이후 전체적인 경제, 사회, 정치 정책의 방향이 기존의 신경제정책에서 탈피하여 공산주의 건설로 본격화되게 된다.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포템킨호의 수병봉기가 있었던 역사의 시공간에 못 지 않게, 이것이 영화화 되어 촬영된 영화의 시간도 이렇듯 상당한 혼돈의 시대 이 었 음을 알 수 있다.

 

4.포템킨호의 봉기-역사적 사실

 

1)개요

 

포템킨호의 봉기에 관련하여 영화에 나온 사실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봉기에 관해 지금 까지 가장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기록하고 있다고 알려진 리처드 휴의 <전함 포템킨>을 참고하여 시간 순서대로 포템킨 호의 봉기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2)봉기의 배경

당시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 사건, 러일전쟁에서의 연이은 패전 등 사회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전역에서 시위와 봉기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사회민주당원들은 이미 곳곳에서 활약 중이었다. 심지어 포템킨호가 배속된 흑해함대의 수병들 중에서도 상당수의 사회민주당원들이 존재했고 이들도 봉기를 이미 계획 중 이었던 상태였다. 또한 복무기간 7, 상습적인 구타, 엉터리 배식, 휴가가 거의 없는 군 생활 및 신분제의 폐해로 인한 장교와 병사들 간의 대립 등으로 상징되는 당시 러시아 해군의 열악한 함상근무 상황은 실상 누가 봉기를 일으켜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3)봉기의 전개 과정

 

- 포템킨 호는 기동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6인치 포와 12인치 포의 내면을 시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05625일 저녁 어뢰정 N267 정이 부식과 육류를 포템킨 호에 보급하였으나, 날이 어두워 고기가 썩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626, 아침 당직자들이 고기에서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썩은 고기가 보급되었다는 소문은 곧 수병들에게 전해졌다. 627, 수병들이 고기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골리코프 함장은 선의 스미르코프 에게 고기를 검사한 뒤 상태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스미르코프는 모여 있던 수병들에게 좋은 고기야. 이상한 데가 없어. 구더기는 식초로 씻어내면 되라고 얘기하고, 함장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하지만 수병들은 고기 스프를 먹으려 하지 않았고, 길리아로프스키 부함장은 골리코프 함장에게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고했다. 함장은 스미르코프를 불러 구더기 스프를 먹어도 괜찮은 지물었다.

 

-스미르코프는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골리코프 함장은 즉시 수병 670여명을 후미 갑판에 집합시켰다. 함장은 이와 같은 행위는 러시아 해군에서는 금지된 것이다. 자 제군들! 스프를 먹을 사람들은 앞으로 두 발짝 나서라.” 부사관 몇 명과 갑판장, 고참 수병들이 앞으로 나섰고, 그 외의 수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골리코프 함장은 제군들이 스프를 먹지 않겠다면, 고기의 질을 재검사하고 그 결과를 함대사령관에게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함대사령관이 너희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고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길리아로프스키 부함장은 자신이 사태를 수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함장은 캡스턴 위로 올라가 해산하려는 수병들에게 재정렬! 갑판장, 위병들을 부르고, 방수포, 가져와!”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해군의 훈련관습에 따르면, 반란자들에게 총을 쏘기 전에 방수포로 뒤집어 씌우도록 명령할 권한이 부함장에게 주어져 있었다. 부함장이 스프를 기꺼이 먹겠다는 수병은 앞으로 나서라라고 말하자, 겨우 50명만이 앞으로 나섰다. 길리아로프스키는 스프를 먹겠다고 앞으로 나선 수병들을 해산시키고, 위병들에게 발사 준비를 명령했다.

 

-이때 마뚜쉔코가 앞으로 나서며 위병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이제 반란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바클린슈크가 총을 쏘며 갑판 위로 나오는 것을 목격한 부함장이 총을 쏘았다. 바쿨린슈크는 치명상을 입었고, 함 내 곳곳에서는 수병들이 장교들을 찾아 나섰다. 길리아로프스키 부함장, 견습 사관 리벤초프, 포술장, 바크틴 중위, 그리고리에프 대위, 톤 대위가 사살되었고, 마카로프 대위, 기관 장교인 나자로프와 자오으스케비치는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구했다.

 

-중위 한 명도 바다로 뛰어드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총에 맞고 말았다. 스미르노프는 총상과 자상을 입고 수병들에 이끌려 후미 갑판에서 바다에 버려졌다. 코발렌코 대위와 알렉세프 중위는 봉기에 가담하였다. 골리코프는 시로프에 의해 사살되었다. 1905627일 오후 3, 포템킨 호의 봉기는 끝이 났다.

 

-오데사에 도착한 포템킨호는 항의발포를 가했다.

 

-오데사에는 이미 사회민주당원들의 활약으로 파업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포템킨 호를 진압하기 위해 군함 2척이 도착하였으나 진압함도 포템킨 호에 동조 하였다.

 

-시간이 흘러 결국 봉기는 실패하였고 선원들의 상당수가 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연안국가나 동유럽 서유럽 등지로 도망 갔고 몇몇의 선원은 훗날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사료들에 의하면 정확한 재판기록이나 인원들의 훗날 신상에 관한 기록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전함 포템킨>의 저자 리처드휴는 당시의 신문이나 타국가의 포템킨 호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이를 유추할 토대를 마련했다.)

 

5.사실과 영화의 차이- ? 누가?

 

1)개요

 

전술한 대로 포템킨호의 수병봉기라는 역사적 사실은 영화 <전함 포템킨>과 큰 차이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영화와 역사적 사실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 영화가 어떠한 차이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어떠한 의도로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분석해 보았다.

 

2)역사적 사실과 영화의 차이들

 

-바르멘 신부는 영화 내에서 마치 구지배계급을 대변하는 듯한 악역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과 동시에 신앙적 가치를 공허하게 외치는(기득권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수병들에게 곤욕을 치르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바르멘 신부는 따뜻한 인간성과 병사들에 대한 신앙적인 유대감으로 병사들에게 인망이 있었고, 봉기사건 당시 인파에 휩쓸려 부상당했던 것을 병사들이 옮겨서 의무실에서 치료해주었다.

 

-영화 내에서는 장교단 전원이 성난 병사들에 의해 총을 맞거나 바다에 빠지지만 실제로 봉기사건당시 2명의 장교는 병사들에게 가담했다.

 

-오데사에서 행해진 포템킨호의 발포는 시위를 유혈진압한 것에 대한 항의가 아닌 함상문제에 대한 발포였고 적어도 그 시점에 한해서는 오데사에서 영화에 나오듯 잔인한 진압이 없었다.

 

-오데사 시위의 도화선은 영화에 등장하듯 숨진 수병 바클리슈크를 보고 분노한 군중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미 사회민주당원들이 해당지역에서 시위를 선동하였고 오데사의 시위대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수포 장면역시 논란이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지배적 이다. 본 영화의 감독 에이젠슈타인 감독조차 자신의 회고에서 사실 방수포 로 덮는 장면은 100% 연출 이었다. 바닥에 깔 의도는 있었지만 덮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는 발언을 한 것은 유명하다.

 

3)왜 영화는 사실과 달라야 했는가?

 

본 영화 <전함 포템킨>을 비롯하여 당시 소련영화들은 소련 체제의 선전과 옹호 및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을 부각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내의 대사 중 하나였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에서 이를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 실제로 이런 구호를 외쳤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본 보고서의 영화의 시공간에 대한 분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소련은 역사적으로 체제의 격랑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현존하는 체제의 성립 계기가 된 혁명을 옹호하고 그러한 혁명을 부른 그 이전의 구시대적 모순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바로 현존하는 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본 영화 내에서 구체제의 상징적 신분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와 장교들을 최대한 무능하고 부패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영화 내에선 유대인을 탐욕스럽게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반유대인 운동을 전국적으로 진행 중 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역시 영화를 통한 선전으로 보여 진다.

 

봉기를 주도한 마뚜쉔코 보다 바클린슈크가 더 부각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영화가 제작된 1925년이란 시점에선 적백내전이 종결 된지 4년의 시간이 흘렀고 과거 맨셰비키의 뿌리가 된 사회 민주당원들이 긍정적으로 알려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마뚜쉔코는 영화 내에서 지워지게 된 것이며 오데사의 시위 또한 사회민주당원들의 활약보단 포템킨호의 봉기로 인해 촉발 된 것으로 역사의 순서를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누가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 냈는가?

 

전술하였듯 당시 소련영화들은 <전함 포템킨>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그 비중이 작거나 크거나와 관계 없이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체제를 옹호하고 혁명을 정당화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 염증을 느낀 몇몇 소련의 몇몇 영화감독과 영화인들은 서유럽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시기에 이미 영화산업 전반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중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장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다.”라는 레닌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 지도부는 대중선동과 체제의 선전을 위해 영화산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데1919년 레닌은 "영화산업의 국영화법령제정하여 당시 소련 내의 모든 극장들을 국가적 통제 하에 두는 것은 물론 중요한 영화 장비, 촬영 인력, 제작기술자 들을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 했다. 또한 국립 영화학교를 설립하여 체계적으로 영화인력 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1922년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의 설립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영화산업에 대해 법률적인 지원을 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체제 홍보, 선전에 유익한 영화와, 영화인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국가의 전일적 통제는 본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도 보이듯 국가를 지배하는 세력의 시각과 이데올로기를 영화에 투영하여 역사적 사실과 비록 다를지라도 그들의 목적에 맞는 영화를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의미와 교훈

 

역사영화를 분석해보고 재해석하는 것에는 나름의 의미와 교훈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사에는 포템킨의 역설이라는 유명한 용어가 있다. 이는 역사적 진실보다는 역사영화 자체의 파급효과가 너무 커서 역사적 사실과는 일부 다른 역사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잠식해 버리게 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를 통해서 의미와 교훈을 살펴보자면 역사영화 자체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의미와 교훈인 것 같다. 본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도 나타나듯 역사의 시공간에 영화의 시공간의 편집자 혹은 정권의 의지가 투영되기 때문에 역사 영화가 100% 온전한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을 수는 없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는 달리오늘날 어느 정도 포템킨 호의 수병봉기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진실을 기록하려 노력했던 역사가들의 의지 때문이다. <전함 포템킨>의 저자 리처드 휴는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진실을 어느 정도 밝히는데 성공했다


그는 국가와 이념이란 장벽을 뛰어넘어 소련역사과학아카데미 소속의 소련학자들로 부터도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러한 진실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역사가들의 연대는 자칫 포템킨의 역설에 의해 완전히 묻혀버릴 뻔했던 포템킨 호 수병봉기의 역사적 진실을 어느 정도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진실은 필요에 따라 왜곡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군중이 아닌 시민의 자세가 필요하다. 군중과 시민은 분명 다르다. 군중은 개별 사건들에 관해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듣고 쉽게 휩쓸리지만 시민은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보수단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개별 사건을 바라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존재다. 집단 내에 군중보다 시민이 더 많다면 권력자들이나 진실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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