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안녕하세요 오늘은 시민의 발인 지하철이 어떻게 탄생했고, 누가 발명했는지 소개하는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하철의 기원과 간단한 역사에 대해 글을 쓰고 그렇다면 한국에는 언제부터 어떻게 지하철이 생겼는지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하철은 영국인 찰스 피어슨이 발명한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발상을 통해 지하철을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그 의문을 해소해드립니다.

 

 

1863110일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됩니다.

 

1801년에 리처드 트레비식이 세계최초로

 

궤도를 달리는 기관차를 만든 이래

 

이룬 값진 쾌거였습니다.

 

1.산업혁명이 만든 런던집중과 지옥 같은 교통난

 

1800년대 중반의 런던은 헬게이트가 열립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많은 부를 안겨주었지만

 

막대한 부작용도 가져옵니다. 환경파괴, 빈부격차, 도시 과밀화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런던 시는 곤경에 빠집니다

 

특히 폭증한 인구로 인한 교통 문제는 생활과 경제발전에도 악영향을 이었고, 런던 공무원들의 출퇴근 시간에 지장을 주기에 이릅니다.

 

진짜로 이것 때문에 대안이랍시고 마차대수를 늘려보기도 했지만 별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은 대항해시대 후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나라였고, 런던 시는 여러 역사적 이벤트로 인구의 증감현상은, 충분히 경험해봤지만 이때는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과거 이런 일이 생기면 적당히 떼우고 넘어가는게 가능했지만,

 

그때의 영국은 노동자들의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주장하던 차티스트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정치가들은 시민들을 달래야겠다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마차 외에는 마땅한 시내 교통수단이 없던

그 시절 런던의 통근자는 25만 명을 돌파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지상기차를 도입하기엔 시의 지상 전체를 손봐야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2.두더지에서 아이디어를 얻다-지하철의 시작

 

 

                                                   (찰스피어슨의 초기 지하철 개념도 by 위키피디아)

 

찰스 피어슨은 런던시의 법무관이자 변호사로

 

시민들의 애로사항을 자애롭게 상담해주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피어슨의 업적은 지하철 도입, 보통선거권 주장, 사형제 폐지 주장, 근로자 처우 개선,사법정의에 평생을 바친 점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훗날 영국 자유당으로 정치에 입문, 여러 업적으로 오늘날도 존경받음.)

런던의 교통문제를 본 그는 두더지 구멍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합니다.

 

런던 시 지하에 두더지 굴 같은게 있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상상만으로 끝내지 않고 열심히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마침내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 하다 못해 산속의 탄광에서도 궤도를 놓고 수레를 끄는데,

지하에 증기기관차를 달리게 하면 좋겠다.”

 

나름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자신한 그는 런던의 정치인과 행정가들을 만나 지하철 도입을 건의합니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no"였습니다.

 

그 후 그는 포기하지 않고 10년간 여론을 조성합니다.

 

평소 인권변호사로서 고위층에 매수된 배심원들이 시민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리는 걸 비판해왔기에 런던시민들은 그를 믿고 지지합니다.

 

지지를 바탕으로 자유당 의원이 된 그는 북부 메트로폴리탄 철도법을 입법함으로서

세계최초로 지하철 개통의 서막을 엽니다.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건설사고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영국은 당시 유럽에서 석탄산업이 제일 발전한 나라였고,

 

덕분에 토목과 관련된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있어 6년 만에 완공하게 됩니다.

 

 

3.대한민국과 지하철

 

1)시대적 배경

 

한국의 철도는 59년 충북선 완공을 기점으로 큰 자신감을 얻습니다.

 

우리의 철도가 구한말+일제강점기와 함께 들어왔던

 

아픔을 딛고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가던 시기였지요.

 

한편 60년대의 본격적인 산업화와 고도성장이 야기한 서울의 팽창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60~70년 사이에만 서울시 인구는 300만이 늘어났을 정도니 굉장했습니다.

 

60년대 초 일부 철도인과 행정가들은 우리도 선진국처럼 지하철을 해보면 어떨까하고

연구 자료는 끄적거려 놨지만 도저히 비용이 없었습니다.

 

한편 버스의 발달과 일제 때 부터 운영되던 노면전차로 60년대 초 까지는 감당이 되었습니다.

 

2)지하철 도입의 계기-전차의 종말,

 

그러나 60년대 중반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던 노면전차는 유지, 관리비가 폭증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산업화 초기 저임금 유지와 물가통제를 위해

 

교통비 인상을 무조건 막고자 했던 행정조치로 신형 전차는 계속 도입되지 못해,

 

결국 전차의 대부분이 수명 40년이 되어가는 형편이었습니다. 60년 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전차 중단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최소한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적자와 안전문제,

 

도로 차선을 차지하는 문제 등으로 전차는 퇴장당합니다.

 

이때부터 잠시 버스만으로 서울의 대중교통이 운영되었는데,

연평균 30만이 상경하는 서울의 인구는 버스 혼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시는 66년부터 지하철 도입을 공론화 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의 모습, 지하철은 소중한 시민의 발입니다. 매일 열일하시는 철도근로자님들 감사합니다.)

 

2)논쟁의 시작- 비용, 서울팽창, 북한

 

도입을 약속했던 김현옥 시장은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물의를 빚어 시장직을 그만두고 바톤을 받은 것은 양택식 시장이었습니다.

 

한때 철도청장을 지냈던 인물로 철도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지하철 도입을 구체화 합니다. 해외의 선례를 살펴보고, 기술적으론 우리의 토목 및 건설 기술로 지하철 시공이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했습니다.

 

철도인 들과 자주 토의를 하기도 하는 등 열성적으로 임했으나 벽에 부딛 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지금도 지하철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근래에 만든 9호선도 약 3조원이 들었고, 지하철 전동차의 가격은 신형을 기준으로 20-25억 정도에 달합니다.

 

가난했던 그 시절 비용은 큰 걸림돌이어서 경제 관료들이 극렬히 반대합니다.

 

당시 경제부 총리였던 김학렬 총리는 330억이란 큰 비용을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고급 담배갑이 150원이었던 시절이니 이시절 330억은 국가예산급의 비용으로

 

이만한 비용의 일을 시단위의 지하철 추진에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지하철을 서울에 두면 수도권 집중과 권역화, 과밀화가 심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아무튼 비용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양택식 서울시장의 의견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성장기 수도집중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면과 언제까지 엉망인 서울시의 교통상황을 방관할 수 없다는 반론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북한은 라이벌리즘이 한창이었던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소련의 기술지원을 받아 지하철을 착공한 것이 한국의 라이벌 의식을 자극합니다.

 

북한은 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착공, 73년 완성했는데 평양 지하철이 모스크바 지하철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깊고 넓은 형태인 이유입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하철 도입은 최종결정되었습니다.

 

양택식 시장은 이후로도 훗날 서울 강남개발, 여의도 정비, 서울의 조림에 업적을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부는 68년 부로 지하철 도입계획을 승인했지만

비용은 여전히 큰 문제였습니다.

 

2)일본의 도움(?)과 한국의 1(!)

 

하늘이 한국을 도왔던 것일까요? 이 시기 일본에선 엉뚱한 사건이 터집니다.

 

요도호 납치사건(1970)이 터진 일본은 한국에 외교적으로 선물을 해줘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 사건을 간단히 요약정리하면

 

적군파(*당시 일본의 극좌테러조직)의 항공기 납치

 

->납치범들의 북한 망명시도->항공기 파일럿의 기지발휘(*서울을 평양이라고 낚는 것. 실제로 적군파의 철없는 20대들은 남북한 구분을 잘 못했음)

 

->한국의 신속한 연락접수+도움->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일시 위장->결국 탄로는 났지만 시간을 벌어 상당수 승객을 구출 (*납치범 4인은 평양행 성공-이중 2인은 현재도 인터폴 적색수배중)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라는 미국의 조언+ 이 사건으로 빚짐->일본은 갚아야함.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은 일본 측에 무상에 가까운 저리차관으로 지하철 1호선 건설비용을 받고,

 

일본인 철도 전문가와 기술자들의 기술자문을 받습니다.

 

일본인 전문가들의 회고를 보면 한국 토목인 들의 실력과 근성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돈이 없었을 뿐이지 설계도만 있었으면 자체기술로 충분히 했을 것이라며..

 

그렇게 지하철 1호선 공사가 시작되었고

 

1974815일 광복절에 맞춰 서울역~청량리역 구간이 개통됨으로서 한국의 지하철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하철은 오늘날 서울시민들에게 소중한 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4.끝으로

 

우선 맺음말을 쓰며 지하철 공사 중 사망,

 

부상한 수백명의 철도인과 근로자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지 못했겠죠.

 

역사가 가치 있는 이유는 반복되는 사례를 통해 현상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김학렬이 양택식에게 했던 반박 중 상당수는 훗날 적중했고양택식이 김학렬에게 했던 말도 대부분 유효했지요.

 

재미 있는건 영국의 피어슨이 지하철 도입을 주장했을 때 반대했던 영국 정치인들의 논리도 김학렬의 논리와 거의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하철 역 중 신촌역을 제일 좋아하는데요지하철 15분만 타면 갈 수 있는 만만한 번화가였던 신촌 부근은 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약속 장소 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행복한 기억이 담긴 지하철역이 있으 신가요하루 중 잠깐은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모두 시민의 발인 지하철을 늘 잘 애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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