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지구촌을 논함에 있어서 지나간 역사를 되짚어봐야 지구촌이 오늘날 왜 여러모습을 갖고있는지 알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역사는 오늘날 남북분단이나 여러복잡한 국제문제,갈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몇년 동안 식민지근대화론이 한창 논쟁이었는데 이에대한 제 짧은 생각을 올려볼까합니다. 당연히 반박하고 싶으신분들은


자유롭게 반박하셔도됩니다. 언제나 반박을 열린자세로 듣는 블로그 주인장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지구촌 코너 주제는 바로 이것 입니다.


<일제의 조선공업화와 분단이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일제의 조선공업화와 남과 북의 분단은 각각 해방 후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본 에세  이는 수업 제13주차에 짤막하게 소개되었던 일제의 조선공업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그리고 일제의 유산인 분단이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미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흔히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학계에서도 언제나 큰 쟁점이었다.

 

그간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박이 있었고, 많은 연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박하는 학자조차도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일제에 의한 "근대성"의 주입에 대해서는 일면 동조하는 견해를 보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식민지 시절 일제가 조선의 제대로 된 과학기술 양성을 하지 않았다는 견해에서도 일제에 의해 좀 더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과학기술의 산물이나 근대 과학적 방법론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사실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의 분야로 볼 수 있는 공업의 분야에 있어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이글은 일제가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조선에 이식했던 기술적 측면들과 일제의 정책들이 해방이후의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분단이라는 유산이 남북의 과학기술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어 공업측면에 있어 식민지 근대화의 허구성과 분단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크게 4가지 주장과 근거를 제시하여 이를 설명해 보겠다.

 

첫째 일제의 대전말기 공업기술과 공업정책은 북한지역 조선인 기술자들로 하여금 후진적 기술을 익히게 하여 후일 북한의 공업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다년간에 걸쳐 북한경제를 분석한 오원철 씨는 그 시기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일제는 대전말기 북한지역에서 <기술총동원요강>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배포했다, 


그 내용에는 북한의 탄광에서 산출되는 갈탄을 이용해서 석유를 만드는 방법, 입철식 제철법, 피마자 씨나 소나무 뿌리로 윤활유를 만드는 방법...(중략)... 이것은 모두 생산성이 매우 낮고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 즉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대전말기 연합국의 봉쇄로 인해 자원부족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공업생산에 있어서 정식기술과 충분한 원료를 토대로 한 정상적인 생산보다는 어떻게든 최대한 원료를 절약하여 기술들을 통해 최대한 원료를 아끼며 생산을 하려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부족한 자원을 만회하고 생산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임시처방은 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업발전에 있어서 대량 생산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기술을 익힌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상당수 교육을 받은 북한지역의 조선인 기술자들은 해방이후에도 그와 같은 방법의 기술을 되풀이함으로서 북한의 공업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초반 북한이 남한보다 우수한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공업이 쇠퇴한 것은 한국전쟁의 여파도 있었지만 이러한 기술자들이 같은 방식의 기술을 되풀이 하여 생산의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북한이 분단과 냉전으로 인해 서방의 최신기술을 도입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또한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들을 해방이후에도 계속 북한에 거주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통해 공업 기술을 익혔다.

 

둘째 일제는 조선의 공업화시기 조선인 기술자들을 하급기술자 위주로 양성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기술적 종속과 열위를 노린 것 뿐 만 아니라 공업의 구조자체를 본토에 예속시킴으로서 조선의 공업이 자체적으로 하급기술 이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신용하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본토에 조선의 공업을 예속시키기 위해 기계공업을 극도로 억압 하였다....(중략).. 기계공업은 본질적으로 기술혁신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군수공업에 있어 타 분야의 공장들은 설치되었음에도 정밀기계, 공작기계들은 모두 일본본토에서만 생산했다.”


 또한 이러한 공업의 예속구조는 단지 조선의 일본에 대한 종속을 노린 것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공업화에 있어서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조선의 자체적인 공업발달과 그것을 통한 자본형성을 막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셋째 일제의 지역편중적인 공업화 정책은 해방 후 분단과 맞물려서 남한의 공업발전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일제는 주로 지금의 북한 지방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였고 45,48년의 통계를 토대로 남북의 광공업 ,금속공업, 제철업, 석유, 화학 등의 주요 자산액의 비율을 비교하자면 대부분 북한이 80%에서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통계의 출처는 scap japanese external assets as of agust 1945,1948 인데 이것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문서중 하나로서 남북한의 경제적 통계를 싣고있다.


남한의 경우 하급기술자는 물론이고 절대적인 생산설비가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에 이후의 공업발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몇몇 소수의 남한의 기술자 들 조차 미군정이 도입해온 새로운 미국식 기술을 익힐 때 기존의 일본식 기술에 익숙해져 있어서 기술의 도입과 습득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넷째 일제가 식민지 시기 남긴 빈약한 공업인프라와 분단이 가져온 사상적인 대립은 조선의 뜻있는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이상을펼치기 어렵게 만들었다.


남북의 대표적 과학자인 이태규나 리승기는 각자 해방이후 남한의 빈약한 공업인프라, 그리고 분단이 빚어낸 각종 사상적 대립과 파동, 그리고 과학기술의 지원에 대한 무관심에 크게 실망하여 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해방 후의 정세와 환경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필수적인 사회적인 안정이나 과학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크게 4가지 주장과 근거를 토대로 일제의 조선공업화와 분단이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들을 살펴보았다.

 

결론을 정리하자면 일제가 그들만을 위한 조선공업화 정책과 조선에 대한 기술적 종속의 유지 , 그리고 그들의 후진적 기술을 이전한 행위들은 해방이후 남과 북의 자체적인 공업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며 더욱이 일제의 패전과 미, 소 양군의 주둔이 빚어낸 분단이라는 


결과물은 그러한 일제의 부정적인 유산과 맞물려 남과 북의 공업발전에 더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나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공업기술이 조선에 들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여러 주장과 근거에 기반하여 자세히 들여보자면 그것이 혹자들이 말하는 한국공업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해방이후의 공업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의 손에 의해 다시 이루어졌다. 다시는 식민지나 분단의 비극과 같은 유산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노력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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