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러일전쟁은 역사와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개화를 택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국제적으로 열강임을 인정받았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역사와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친 러일전쟁의 간단한 배


경과 그 영향에 대해 알아보는 글을 써보겠습니다.


1.러일전쟁의 원인


<1>3국간섭과 일본이 겪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국제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고 조선에대한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것이 중국의 요동반도를 갖는 문제였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가지기로 되어있었으나, 독일,러시아,프랑스의 간섭으로 실패하게 되는데


이것을 3국간섭이라고 합니다.


독일,프랑스,러시아가 착해서 중국을 도와준 것은 아니고 모두 중국에 이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구 유럽세력은 중국대륙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만주를 통과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는 동청철도의 부설권과 관동주의 조차권을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상태였습니다.


독일은 교주만을 프랑스는 광주만을 조차했습니다.


당연히 이 열강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을 가져야하는 중국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간섭을 통해 이를 좌절시키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것이 러시아였습니다.


<2>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분쟁을 겪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철도 부설권등의 이권을 만주로부터 획득하고


조선내부의 친러파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런 러시아의 움직임은 일본으로서도 달가울 수 없는 것 이었습


니다.


<3>러시아에 대한 안보위협감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북해도 개발이나 사할린 등의 부지 진출을 통해 러시아와 접촉한바 있었고 19세기말 부터 러시아가 일본의 안보위협이 될지모른다는 것이 일본의 식자층에 크게 퍼지게됩니다.


특히 포사드니크호라는 군함은 1850년대에 일본의 섬을 포위해서 무력시위를 한적도 있엇고,


일본은 이를 두고두고 기억 러시아를 사실 오래전부터 가상 안보적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러일전쟁의 간단한 경과 입니다.


<1>영국과 미국의 일본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동맹을 끌어드립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각지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지중해의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좌절시킨 크림전쟁도 그랬고, 아시아 방면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할 경우


영국의 해상패권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영국의 외교전략은 유럽대륙에 지배적인 주도권을 갖는 국가가 출현하여 섬나라인 영국을 포위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노력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었고, 마침 아시아에서 세력을 늘리려고 하는 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제법멀었고 일본이라는 파트너를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미국 역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다른 유럽열강과 중국에서 시장진출을 원했지 러시아가 진출하면 불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본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영국과 일본은 1902년 동맹을 맺게됩니다.


<2>일본과 러시아의 협상결렬이 있었습니다.


일본내에서는 이른바 만한교환론 즉 만주를 러시아에 주고 한반도를 일본이 갖자는 식의 여론이 있었고


러시아에 이를 전달했으나 러시아로서는 자신의 국력과 맞지않는 일본이 이런 협상을 제의하는 것을 무시했고,


영국과 일본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를 일본에 내줄 수가 없어 협상은 결렬됩니다.


<3>용암포 충돌사건은 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1903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요구로 격화됩니다.


러시아가 신의주 남쪽에 있는 용암포의 조차를 조선에 요구한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은 당연히 반대했고 러시아는 순수하게 벌목사업을 위하여 용암포에 군대와 노동자들을 파견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문제가 됩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3국간섭 이후 뿌리 깊은 대러 불신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반정부 정치인이나 언론이 중심이 되어 그런 강경한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4>간단한 전쟁의 경과를 소개드립니다.


결국 일본은 전쟁을 결심하게 되고 전쟁은 일본의 기습으로 시작됩니다.


일본은 우선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전쟁이 수월하다고 생각 대한제국의 중립선포를 무시하고 압력을 가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채택합니다.


1904. 29, 일본의 기습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뒤 여순공방전 203고지 전투, 봉천전투 등에서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는 점점 패전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격멸하는데 성공해 전쟁에 승리하게됩니다.



3.러일 전쟁의 결과입니다.


<1>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와 만주에 있던 러시아군을 격퇴시키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엄청난 비용이 동원되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가 국력이 훨씬 대단했고, 일본이 전쟁을 위해 영국과 미국으로 부터 빌린 차관이 많았기 때문에


이 이상 빚을 지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이 관리해야할 전선이 많이 확대되었고 무기와 탄약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러시아 역시 연이은 패전이 있었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병력숫자와 군사력은 일본보다 강했기 때문에 더 시도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내부적으로 피의일요일 사건 등 정치혼란이 깊어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은 전쟁을 적당히 마무리짓길 원했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중재할 의사를 보입니다.  


처음엔 루스벨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양국 모두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러시아 제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지도, 보호, 감독권을 승인한다.

2. 러시아 제국은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 승인 및 장춘 이남의 철도부설권을 할양한다.

3. 일본 제국이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2]으로 러시아는 쿠릴 열도 및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 섬을 할양한다.

4. 러시아 제국은 일본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2>조선과 만주의 일본세력권화가 진행됩니다.


위의 포츠머스 조약에도 나와있지만 이건 사실상 만주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준 정책이라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열강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이어 러시아마저 사라진 조선에서 사실상 조선은 이후 일본의 식민지라는 슬픈 운명을 걷게됩니다.


<3>국제적인 파장이 컸습니다.


러일전쟁 초반에는 대부분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해버려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게되었고,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일본도 이기지못했다며 무능한 황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져 


이런 황실에 대한 비판여론은 계속 늘어나 훗날 공산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본은 그후 이 전쟁에서 승리한 판단을 계속 이어나가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하고 조선을 병탄하게 되어


훗날 태평양 전쟁의 전주곡을 마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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