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다이쇼데모크라시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부분중 하나입니다.


1920년대에 있었던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의 확대는 메이지유신 이후 거듭된 전쟁으로 다소 자유가 제약되어 가던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계기였습니다.


이때 일본 왕의 연호는 다이쇼 였고, 메이지유신이 메이지를 따서 이름을 만들었듯, 


다이쇼의 이름을 따서 1920년대의 이러한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이쇼데모크라시는 한계가 있었고, 이런 한계때문에 결국 1930년대 일본 군부의 등극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쇼데모크라시란 무엇이고 어떤한계가 있었는지 일본 역사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이것을 설명하며


1920년대 일본의 역사를 장식한 다이쇼데모크라시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지식이 짧아 책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1.다이쇼데모크라시란 무엇인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러일전쟁 이후부터 중국의 침략이 강화되는 1930년대 까지의 


일본정치와 사회, 문화 분야에서 자유주의 분위기가 고양되어 


민중의 권리가 신장한 것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그 시기가 일본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 시기(1912-26)와 겹쳐 있기 때문에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로서 정의합니다.


2.배경


<1>지속적인 시민의식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 일본인들의 교육수준은 더욱 높아진 상태였고 언론, 출판물 등을 통해 이전시기의 일본인들보다 많은 사회적, 정치적 지식을 쌓은 상태였다. 또한 꾸준한 대외 무역량의 증가와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은 이들로 하여금 더더욱 사회, 경제적 이익의 배분문제를 다루는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2>다이쇼 정변(1912)이 있었습니다.


19118월 입헌정우회를 여당으로 하는 제2차 사이온지(西原寺)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내각은 러일 전쟁이나 조선 식민지화 비용등으로 악화된 정부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행정, 재정의 정리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군부는 이를 반대하였지만 그러나 육군재정문제에 우선을 두었던 사이온지 내각은 이를 거절하였다.

 

육군의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육군대신인 우에하라 유사쿠(上原有作)와 함께 후임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 임명 시에 육군대신의 추천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내각을 구성못하게 하여 


사이온지 내각은 마침내 총사퇴하게 됩니다. 곧이어 들어선 3차 가쓰라 타로(桂太郎) 내각은 정당을 억누르고 의회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누카이 츠요시(犬養 毅)와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대적인 헌정옹호운동을 전개하였고 많은 언론인과 도시민, 상공업자들까지 가담하여 의회를 포위하고 


신문과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는 등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을 다이쇼 정변이라 합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점점 행동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정치행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일본 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와 부작용도 원인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8)의 호경기와 한편으로의 부작용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더욱 격렬한 사회운동을 부르는 요인이 되었다.

 

1차 대전의 호황은 일본사회의 구조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많은 상품을 수입하게 되었으며 


일본사회는 큰 무역흑자를 누리게 되었고 이시기의 공업발전은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숫자를 큰 폭으로 증가시켰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아시아 지역에 수출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일본은 수출을 늘렸고 한편으론 영일동맹을 근거로 하여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세력범위를 확대합니다.

 

결국 일본의 경제는 발전하게 되었으나 


이런 경제성장의 혜택이 모든 계층에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농촌사회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소지주나 자영농 보다는 대지주나 대농장을 경영하는 계층에게 큰 이익이 돌아갔고 도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는 노동자나 도시 중산층 보다는 공장경영자나 대자본가, 기업인들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갔다


급격한 호황은 당연히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기 마련이었고 곡물가격과 기타 생필품의 물가를 크게 상승시켰습니다.


 

경제적 성장과 그것으로 파생된 이익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던 문제, 공업화의 심화, 영세농민들의 생활고는 자연히 저항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었고 이시기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으며 파업 또한 빈번하게 일어났다. 농촌에서는 소지주나 영세농들이 대지주에게 저항하여 낮은 수준의 마찰부터 크고 작은 소작쟁의까지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의 요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형성배경에는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중들의 정치적 요구, 사회구조적인 변화가 낳은 사회운동의 증가라는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의 제도변화


 

<1>최초의 정당내각 (1918)이 구성됩니다.

 

1918년 하라 다카시를 필두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의 특징은 육-해군 외무대신을 제외한 모든 각료가 정당원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화사 족이나 번벌 이나 작위를 가진 고위층보다는 조각(造閣)시에 정당원 위주의 각료 인사가 이루어졌다.

 

일본은 1885년에 이미 내각제를 도입하였지만 내각의 각료인사라는 것은 현재의 의원내각제하의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 국회의원이나 혹은 관료출신이 내각의 각료가 되는 구조라기보다는 


주로 구 기득권층인 화사 족이나, 기타 천황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고위층들에 의해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라 다카시 내각은 하라 다카시 본인부터 번벌이나 화사족 출신이 아니고 평민출신 국회의원으로서 평민재상이라는 말을 대중으로부터 들었을 정도로 평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최초의 정당내각제 구성이라는 것 자체에도 의의가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의의는 하라 다카시의 수상임명 과정과 그것에 담긴 의도에 있다. 당시 일본 수상의 임명은 메이지 헌법에 의거하여 


천황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천황에게 자문과 보필을 행하는 기관인 추밀원과 그곳에 포진한 소위 말하는 원로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고 실제로 원로들의 의사가 수상을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원로들이 하라 다카시를 추천한 이유는 1918년 농민들의 쌀 소동, 그리고 이시기 민중운동(노동운동, 소작쟁의)을 보고 평민출신의 수상을 임명함으로서 국민들의 불만을 완화해보기 위해서였다


즉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 사회운동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원로들에게 까지 고려사항이 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수상 선출방식이 변화합니다.

 

앞의 단락에서 서술하였듯이 당시까지 일본정치에서는 의원내각제의 일반적인 흐름인,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어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원로들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컸다


1919년 선거법 개정과 


선거권자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정당의 영향력을 증대시켰으며 기존의 방식(원로들의 중의에 따라 천황이 후임 총리에게 대명을 내리는 식의 선출방식)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비판받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비판이 수용되어 19245월의 선거에서부터 관행이 바뀌게 되었다.


바뀐 관행에 의해 19245월의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수당이 된 헌정회가 당수인 가토다카아키를 내세웠고 가토 다카아키(加藤 高明)는 천황에게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어 내각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된 정당의 당수가 천황의 위임을 받아 수상으로 선출되고 조각을 책임지는 양대 정당제(이시기 주요 양대 정당은 정우회와 헌정회)가 정착되게 되었다.

 

<3>두 차례의 선거법 개정이 있었습니다.

 

선거법의 개정은 유권자의 숫자를 늘렸고 그를 통해 정당정치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첫 번째의 선거법 개정은 1919년에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10엔 이상의 납세자에서 3엔 이상의 납세자로 기준을 완화하였다


두 번째 선거법 개정은 1925년에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납세의 여부에 상관없이 25세 이상의 남성이면 누구나 투표권을 갖는 다는 것을 골자로 한 것 이었습니다.



4.이 시기의 사상적인 흐름


<1>민본주의

 

19161월 요시노 사쿠조는 데모크라시를 민본주의(民本主義)로 번역하면서 그 뜻을 이렇게 풀고 있다. 그가 파악한 헌정의 근저는 '정치상 일반 민중을 중시하고 그 사이에 상하의 구별을 두지 않으며


국체가 군주제이건 공화제이건 상관없이 널리 통용될 수 있는 주의'에 있으며, 이를 민본주의라 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의 발전을 단계별로 구분했는데 그 단계의 순서는 이렇다. 첫 단계는 다수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의원내각제 확립이다. 두 번째 단계는 보통선거제 도입이다. 보통 선거제라는 정치적 평등 아래에서 사회정책 등에 의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이 마지막 3단계다


민본주의는 일반 민중의 이익·행복을 목표로 하며, 민중의 의향을 중시하는 정치라고 강조한다. “부국강병론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이것을 낡은 사고라 판단하고 '국가의 새로운 역할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고 주장한다.

 

또한 요시노는 국가주의 사고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군부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식민지화, 중국의 침탈, 시베리아 출병 등을 예로 들면서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비판한다.


(요시노는 조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의 조선 무단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서술하기도 하였고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을 보고 만행이라며 분개했다.)

 

요시노는 당시의 학자와 지식인, 저널리스트와 함께 '세계의 대세에 역행하는 위험한 완명(頑冥) 사상을 박멸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191812월에 '여명회(黎明會)'를 조직했다


군국주의에 대응하여 민본주의, 자유주의를 주장한 여명회는 여러 강연회와 홍보자료를 통해 자유주의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

 

<2>사회주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 혁명 그 자체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타 지역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되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고, 일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1918년 과 1919년 도쿄대, 와세다 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인회(,人會)건설자 동맹 등의 사회주의 단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192012월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의 마르크스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의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문인, 학생단체, 노조 간부 등,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를 포괄하여 '일본 사회주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하라 내각은 이런 개혁 세력에 대해 혹독하게 대처하면서


·무형의 압박을 강화하여 결국 다음 해 5월의 제 2회 대회는 무산되었고


동시에 동맹 자체가 치안 경찰법에 의해 결사 금지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 이런 탄압적 국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합법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며, 내부 논쟁으로서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립이 격화된다.

 

동맹의 해체 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던 세력은 일본의 혁명을 위해서는 비합법적 혁명정당의 건설이 시급하다는 인식 하에 


19227월에는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에 의해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일본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19233월의 임시 당 대회에서는 '보통 선거, 전제군주제 폐지, 노동조합 결성 노동자의 기타 노동자의 권리' 등의 당면한 요구 조건이 확인되었고, 결정되지는 


못한 강령 초안에는 군주제의 폐지를 비롯한 정치적 민주주의, 농업 혁명과 독점 자본의 억제에 의한 인민의 생활 개선, 외국에 대한 간섭 중지 및 조선·대만의 식민지 해방 등이 언급되었다.

 

<3>천황기관설


한편 헌법학자 였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천황주권설을 비판하고 천황기관설을 주장했다, 이 내용은 천황이 국가통치권의 주체임을 부정하고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속하며, 천황은 그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 할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메이지 말기 이래 공인되었던 


천황주권설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통치권은 천황의 전유물이 아니고, 그 행사역시 무제한적이 아닌 헌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천황대권을 명분 삼는 군부와 우익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이 이론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의회의 권한강화를 통한 내각제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 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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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우익사상, 국가주의 사상


1차 대전 이후의 격랑은 천황 지배의 절대성과 국체 옹호 등의 '국수(國粹) 보존'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우익 이외에도 새로운 우익의 출현을 낳았다. 그들은 반 기성 정당· 반 자본주의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현상의 국가주의적 '혁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파시즘 운동으로 연결되어 갔다


기타 잇키(北一輝)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등을 중심으로 19198월에 조직된 것이 '유존사(猶存社)'이다. 이들은 일본 제국의 근본적 개조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삼아, 군인과 청년들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

 

특히 신형 우익의 대표적 인물로서 기타 잇키는 1923년의 저서 일본개조법안 대강을 통 해 천황 대권의 발동에 의한 헌법·의회의 정지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사 정권의 수립을 구상했다


일정금액 이산의 사유재산 몰수, 일정 부분 이상의 개인 소유토지의 압류와 재분배,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의 국가 사회주의적 일본 개조를 포함하여, 대외 정책으로서는 군사력에 의거한 적극적인 해외 공략을 주장하는 군국주의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기타의 저서와 사상은 1919년의 첫 출판 이후 지속적으로 유포되면서 그 저변을 넓혔다. 대표적인 지지자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하에서 군비축소의 흐름과 협조외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었고 


청년 장교들 중에는 훗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주축이 되는 여러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타 잇키의 이러한 사상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민이나 노동자, 도시 하층민들의 불만에 스며들었고 이들로 하여금 정당정치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서 후일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가는데 영향을 끼쳤다.  


5.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와 실패는 명백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성과도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일본은 1930년대에 군국주의를 택하게 됩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막을 내리고 군국주의가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대공황(1929)으로 인한 불황의 시작과 그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을 군국주의 파급에 이용했던 군부가 있었다


이 시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역사책과 역사적 서술에서 이러한 원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도적 한계도 컸습니다. 우선 다이쇼 시기의 내각인사나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 속성에서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정부는 집회에 대한 사전 허가권 및 해산권을 갖고 있었고 치안경찰법, 치안유지법 등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했고 또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특히 일층 심한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정당정치의 민중지지획득실패도 큰 원인 이었다. 이 시기의 정치 시스템은 많은 선거자금을 필요로 하였고 이는 각 지역의 유지나 돈이 많은 부자들의 입지가 크게 반영될 여지를 낳았다


따라서 정당정치시기 일본 정치인들은 소지주나 자영농, 소상공인, 저소득 계층의 문제보다는 재벌이나 대지주, 대자본가 위주의 정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에 실패했다.

 

결국 민주적 정당정치에 대한 일반 시민, 일본의 극우세력, 군인들의 시각은 정당정치가 부정과 부패만 낳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이것을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선전하게 되어, 정당정치는 강한 비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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