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러의 스마트한 세상사 :)!!

청일전쟁은 과거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벌였던 전쟁입니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로어느정도 열강들에게 인정을 받게되고


이어져서 벌어지는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함으로서 군국주의의 길을 가속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지 알아보는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1.청일전쟁의 배경과 원인입니다.

 

첫째로는 일본 내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한 사상과 관념이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내의 대표적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탈아론>을 통해 중국과 조선이 서구화되기 이전 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도리어 그들과 헤어져 서양과 함께 움직여야한다.

 

조선과 중국은 나쁜 친구이며 그들을 사절해야한다고 밝히며

 

청일전쟁 당시 전쟁의 성격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규정한바 있습니다.

 

한편 일본 군부의 원로의 위치에 있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자신의 저서 <외교정략론>을 통해서 이익선과 주권선개념을 주장했습니다.

 

일본의 독립과 자위를 위해서는 주권선의 방어와 함께 이익선의 방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주권선이란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즉 일본의 본토를 가리키고

 

이익선이란 주권선의 안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접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조선이 바로 이익선 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당연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익의 획득문제였습니다.

 

이미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시기부터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1876년 운요호 사건과 그것을 빌미로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일전쟁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에 대해 야심을 가져왔습니다.

 

조일수호조규의 제1조의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 라는 표현은 기존 국제질서하의 조선의 청에 대한 상하관계를 부정하려는 목적이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청나라 즉 중국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권익의 획득문제가 있었습니다.

 

청은 바뀐 국제질서에서 과거의 국제관계(조공질서)가 아닌 근대적 국제관계(제국주의 열강들의 방식)를 조선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화하려고 합니다.

 

한편 중국과 일본은 청일전쟁 이전에도 이미 충돌했던사례가 존재합니다.

 

일본의 류큐(오키나와)에 대한 영유시도가 대표적입니다.

 

1871년 미야코, 아에야마의 류큐어민이 대만에 상륙 했다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방적으로 류큐 왕국의 호칭을 없앤 후 류큐 번으로 바꾸고 일본정부의 직할령으로 확정합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하여 자국민 보호의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874년 타이완 원정을 실행했습니다.

 

당연히 청나라는 반대했고 예상외의 저항과 익숙하지 않았던 대만의 전쟁환경으로 난항을 겪은 일본군은 영국 등 열강의 중재를 받아들여 끝납니다.

 

아무튼 이사건은 상호간의 신의를 크게 훼손하게됩니다.

 

조선의 내부사정 역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당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 난들을 진압하고 터지고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중국의 청군이 오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1885년 청-일 양국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를 대표로 하여 천진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천진조약의 내용은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고하도록 하며, 사태가 진정되면 철병하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2.청일 전쟁의 경과입니다.

 

조선의 왕실은 동학농민운동을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습니다.

 

청나라가 오니 일본도 와버렸고 결국 영국의 일본과 중국에 대한 중재도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내부의 난이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본군은 아산만의 청 함대를 기습적으로 선제공격 하였고 이로서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주요 전투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894.7.25 풍도 해전-> 7.29 성환 육전 (지금의 충남 아산 북쪽)->8.1 선전포고-> 9.5-16 평양성 전투->9.17 황해해전->10. 일본군 요동 상륙->10.29 봉황성 점령->11.22 여순점령->1895.1.30 위해위 해전->북양함대가 일본에게 패배한 후 청국은 강화의사를 표명하게 되다.

 

3.청일 전쟁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로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게 됩니다.

 

1895.4.17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한다. 전비배상금으로 2억 냥을 7년 분할로 지불한다.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개시, 개항한다. -유럽제국간의 조약을 기초로 청일통상항해조약과 육로무역 협정을 개정한다.

 

의창-중경 간, 상해-소주-항주간의 기선항로의 승인 개항장에서 각종 제조업에 일본인의 종사 권을 승인하고 내국세에 대한 특전을 부여한다. 등이 있습니다.

 

청일 전쟁의 결과는 당시의 국제사회에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생각은 청국이 아무리 부패했더라도 청은 일본보다 훨씬 대국이며 오랫동안 동양의 패권국으로 군림한 국가였습니다.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국가라고 판단했기에 일본이 큰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단번에 깨버리고 일본을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중국을 중심국가로서 질서가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붕괴되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청나라에 대한 승리로 일본의 세력이 조선과 만주에서 크길 원하지 않았던 러시아는 간섭을 통해 요동반도를 일본이 갖는 것을 저지하고

 

이것은 훗날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인 러일전쟁의 배경이 됩니다.

 

한편 중국은 이패배로 대국의식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께 되었으며 다가왔으며 한편으로는 그동안 추진해온 양무운동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지속적으로 청국에 불평등한 조건을 요구해온 서양열강들이 청국이 중국에게 패하자 더욱더 무리한 요구와 침략행보를 가속화한 부작용도 있습니다.

 

(ex 러시아의 만주지역 세력 확대, 영국은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대)

 

결국 단순히 서양의 무기와 기술만 받아들여서는 근대화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변법세력들이 등장하여 변법자강운동(입헌군주제, 정치제도개)을 추진하게됩니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로 군국주의적인 기풍이 점차 확산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조선의 경우 이 전쟁을 통해 조선내부의 친청적인 세력이 쇠퇴하고, 친러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중국까지 이긴 일본을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통해 좌절시키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붙으면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내의 정치흐름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폭주하여

 

을미 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했고, 이것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계기가 되어 조선내의 친러성향은 더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결국 청일전쟁은 단순히 일본이 중국을 이기고 끝낸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국제질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선내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을 끝낸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인 러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한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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